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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조련사…씨름계 대부 윤병태를 추억하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32)

씨름 경기 모습. [사진 대한씨름협회 영문 자료집 ‘씨름’]

씨름 경기 모습. [사진 대한씨름협회 영문 자료집 ‘씨름’]

대구에는 ‘한국씨름연구소’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씨름 선수였던 박승한(66) 영남대 명예교수가 1993년 문을 열었다. 그는 대학에서 체육학을 가르치고 연구했다. 최근 박 명예교수를 만나 씨름 이야기를 들었다.

60~70년대 국내 씨름판 휩쓸었던 대구 영신고

그는 대구 영신고를 나왔다. 영신고는 씨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벌써 반세기가 지났지만 영신고는 1965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기‧전국체전 등 전국 규모 대회에서 고등부 단체우승 81회, 개인전 우승 600여 회라는 성적으로 씨름판을 휩쓸었다. 그 ‘전설’ 뒤엔 명조련사가 있었다. 키 170㎝ 몸무게 65kg의 자그마한 체구의 고 윤병태(1934∼2015) 감독이다. 윤 감독은 대구 계성고에서 씨름 선수로 입문했다. 당시 경량급 최강자로 통했다.

‘한국 씨름계의 대부’로 불리는 고 윤병태 영신고 감독. [사진 유족 제공]

‘한국 씨름계의 대부’로 불리는 고 윤병태 영신고 감독. [사진 유족 제공]

그러나 그의 참모습은 선수보다 지도자였다. 윤병태는 체육과 중등 준교사 자격증을 딴 뒤 경북지역 고등학교에서 씨름을 지도한다. 1960년대 중반 영신고는 학교를 씨름 명문으로 만들기 위해 윤병태를 스카우트했다. 그때부터 윤 교사는 학교 재단의 지원으로 전국에서 씨름 선수 재목감을 스카우트해 체계적으로 길렀다.

1970년대엔 김성률이란 장사가 씨름판을 장기 집권했다. 당시 박범조‧홍현욱‧이봉걸 등 영신고의 선수 3명이 고교생으로 김성률의 아성을 거듭 무너뜨렸다. 윤 감독이 영신고에 몸담은 20년 동안 배출한 역사(力士)는 이들 외에 장해식‧강시후‧류기성‧성용우 등 무려 300명에 가깝다.

대구의 ‘한국씨름연구소’. [사진 송의호]

대구의 ‘한국씨름연구소’. [사진 송의호]

당시 씨름판은 대학‧일반부를 합쳐 선수의 70%가 영신고 출신일 정도였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씨름 지도자로 활동해 윤병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씨름 선수와 지도자를 배출한 ‘한국 씨름계의 대부’로 통한다.

윤 감독은 씨름에서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 대응을 지시하는 명수였다고 한다. 그는 “사람 몸은 수학 공식과 같아 기초가 돼 있고 열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의 지도 방식은 힘과 기만이 아니었다. 마음까지 보탰다. 대회에 나갈 때 자신의 출장비 10만원을 “선수들 잘 먹이라”며 선뜻 내놓곤 했다. 또 시합을 앞두고 다른 도시에서 묵을 때는 밤 10시쯤 숙소를 돌며 잠자리에 든 선수들의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곤 했다. 아버지 같은 넉넉함으로 선수들을 이끈 것이다.

회갑연 때 제자들이 가마 태우고 경기장 돌아

박승한 명예교수가 수집해 한국씨름연구소에 보관 중인 각종 씨름 관련 물품. [사진 송의호]

박승한 명예교수가 수집해 한국씨름연구소에 보관 중인 각종 씨름 관련 물품. [사진 송의호]

덕분에 그는 1994년 전국씨름왕 대회가 열린 대구시민체육회관 모래판에서 제자인 씨름 스타들에 둘러싸여 회갑연을 맞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영신고 씨름 동문 250여 명은 십시일반 700만원을 모아 거북이 반지 등을 선물하고 남은 돈을 전했다. 그러자 윤 감독은 반지만 받고 받은 돈은 다시 내놓았다. 제자들은 스승을 가마에 태워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았다. 씨름계에 회자되는 사제 회갑연이다.

제자인 박 명예교수는 윤 감독의 권유로 운동과 공부를 겸한 뒤 대학교수가 됐다. 미국에서 유학도 거쳤다. 그는 스승인 윤 감독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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