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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언제든 부당해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현예슬의 만만한 리뷰(42) 드라마 '송곳'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긴 연휴의 첫날, 오늘은 영화 대신 연휴 때 볼만한 비교적 호흡이 긴 드라마 한편을 골라왔습니다. 2015년 JTBC에서 방영한 12부작 드라마로 선과 악이 아닌 권력의 상하관계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폭력의 군상을 그린 드라마 ‘송곳’입니다.

드라마 '송곳'의 화자이자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수인(지현우 분). 육사 출신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인물이다. [사진 JTBC]

드라마 '송곳'의 화자이자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수인(지현우 분). 육사 출신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인물이다. [사진 JTBC]

극의 화자이자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수인(지현우 분)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인물입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사람이죠. 지금과 같은 시대에 보기 드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사 출신의 그는 군에서도 상부에서 선거 때 특정 인물에 투표하라는 지시와 군납 비리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면서 상부에서는 눈엣가시로 동료와 후배들에게는 같이 있기 불편한 인물이었죠. 이런 부당한 지시에 환멸을 느낀 그는 전역합니다.

전역 이후 그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 기업인 대형마트 ‘푸르미’의 일동점 청과물 과장으로 근무합니다. 근무하는 동안에도 입점 업체들의 접대 자리가 수시로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 요령껏 피해왔고, 성과가 곧 보상이 되는 외국계 유통회사는 원리원칙주의자인 그에게 있어 좋은 직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장 정민철(김희원 분)로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판매직 전원을 해고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이수인이 이를 거부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죠.

원칙주의자 이수인(맨 오른쪽)이 자신의 소신으로 노조에 가입하자, 본래 그를 총애하던 외국인 지점장(가운데)은 부장 정민철(김희원 분)과 매장에 나타나 이수인을 공개적으로 괴롭히고 질타한다. [사진 JTBC]

원칙주의자 이수인(맨 오른쪽)이 자신의 소신으로 노조에 가입하자, 본래 그를 총애하던 외국인 지점장(가운데)은 부장 정민철(김희원 분)과 매장에 나타나 이수인을 공개적으로 괴롭히고 질타한다. [사진 JTBC]

이 드라마는 최규석 작가가 2013년 12월부터 2017년 8월까지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한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2014년 오늘의 우리 만화 한국만화가 협회장상, 2018년 부천만화대상 대상을 받은 이 작품을 위해 최 작가는 2008년부터 무려 5년에 걸쳐 취재했다고 하는데요.

이수인의 실제 모델이 되는 김경욱 전 한국 까르푸-이랜드 일반 노조 위원장은 최규석 작가의 북 콘서트에서 "한 컷을 그리기 위해 몇 시간씩, 지칠 때까지 이야기하는데 나중에 만화를 보면 조금 밖에 안 나온다"며 우스갯소리를 전한 만큼 한 컷을 그리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에서 노동상담소장 '구고신'은 부당해고, 임금 체불 문제를 해결해주는 노무사이다. 푸르미 노동조합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한다. [사진 JTBC]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에서 노동상담소장 '구고신'은 부당해고, 임금 체불 문제를 해결해주는 노무사이다. 푸르미 노동조합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한다. [사진 JTBC]

마트 판매직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면서 그들을 자르기 위한 중간관리자들의 횡포에 몸서리쳐집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그들도 어떻게 보면 고용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물론 그들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가 선과 악이 대립해 싸운다기보단 권력의 차등에 따라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여기에서 중간관리자인 이수인이 마치 '송곳'처럼 틀을 깨고 판매 직원들의 편에 서게 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개인주의자에 가깝던 이수인이 그들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게 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가 어느 정도 타협을 해 나가는 과정들은 그에게 연민을 느끼게 합니다.

중간관리자인 이수인은 판매 직원들의 편에 서게 되면서 극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변화해간다. 사진은 이수인과 사측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인데 이수인에게서 좀처럼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극단적인 분노를 드러낸다. [사진 JTBC]

중간관리자인 이수인은 판매 직원들의 편에 서게 되면서 극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변화해간다. 사진은 이수인과 사측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인데 이수인에게서 좀처럼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극단적인 분노를 드러낸다. [사진 JTBC]

노조와 노동법 하면 시위하는 사람들, 8~90년대 운동권(?)에 있었던 사람들, 또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이 드라마를 꼭 보셨으면 합니다. 물론 우리가 TV나 다른 매체에서 접하는 노조 활동이 일부 극단적인 모습일지 몰라도 노조와 노동법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로 혹시 '취업규칙'이란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쑥스럽지만 저는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취업규칙이란 근로자가 취업상 준수해야 할 규율과 근로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을 정한 규칙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상시 10인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용자는 그 사업장에 적용될 취업규칙을 작성하여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해야만 합니다. 취업 규칙에는 업무의 시작과 종료 시각, 휴게시간 임금, 퇴직 등의 내용이 포함됩니다(근로기준법 제93조).

근로자와 사업자가 알아야 할 기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취업규칙이 실제로 회사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근로자가 대부분이며 심지어는 인사팀에서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강한자들에게는 강하고 약한자들에게는 약한 '구고신' 역을 맡은 배우 안내상. [사진 JTBC]

강한자들에게는 강하고 약한자들에게는 약한 '구고신' 역을 맡은 배우 안내상. [사진 JTBC]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몰랐던 딱딱하고 어려운 노동법을 노동상담소장 ‘구고신’이라는 인물을 통해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하는데요. 드라마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노동법에 대한 공부가 저절로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소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언제든 나 또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구요. 이 드라마를 통해 한 번쯤 그분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송곳'의 등장인물들처럼 이 세상 모든 부당함과 싸우고 계신 근로자 여러분들 화이팅 입니다!

송곳

'송곳' 공식 포스터.

'송곳' 공식 포스터.

원작: 최규석
연출: 김석윤
극본: 이남규, 김수진
출연: 지현우, 안내상
편성: JTBC
방영기간: 2015년 10월 24일~11월 29일
방영회차: 12부작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현예슬 hyeon.yese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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