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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책임 어디까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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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노리나 허츠 교수는 '소리 없는 탈취-세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죽음'에서 "기업이 세상을 지배하고, 시장이 법 위에 존재하며, 투표가 과거의 일이 돼 버린 세계가 온다"고 주장했다.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는 다국적 기업이 국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대신하는 세상이 곧 올 것이라는 경고다. 2001년 9월 영국의 한 경제 칼럼니스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서 권력을 빼내 대기업에 넘겨줬다"며 토니 블레어 총리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기업이 정부보다 더 센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기업의 힘이 정부보다 더 세다고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한국에서도 이런 주장이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는 지난해 8월 '견제받지 않는 권력, 삼성을 말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참여연대는 이 보고서에서 "삼성의 거대한 힘이 그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발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문어발처럼 유능한 인재를 빨아들여 '안 되는 일까지 되게 하려'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많은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먹혀들고 있다.

실제 그런가. 기업이 과연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는 무소불능 집단인가. 현실은 좀 다른 것 같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기업이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이런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기업의 존재가 갈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기업이 '이윤'을 창출해 '주주'에게 많은 배당을 하면 그 자체로 기업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구시대적이다. 기업은 기업 자체의 '지속 가능한(sustainable)' 발전을 위해서라도 사회적 이슈를 외면할 수 없다. 기업이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외면할 경우 기업의 발전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른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이런 차원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최근 삼성그룹이 8000억원을, 현대자동차그룹이 1조원을 사회공헌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반적인 반응은 썰렁하다. 엄청난 금액을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내놓겠다는데도 시큰둥하다. 삼성이나 현대차그룹이 돈으로 잘못(?)을 얼버무리려 한다고 보는 것 같다.

더욱 큰 문제는 삼성.현대차의 이런 결정이 나오게 한 사회 분위기다. 많은 대기업 경영인이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사회공헌기금을 얼마나 내놓아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걱정한다. 양극화 해소를 위해 대기업이 돈을 내놓도록 강요하는 현실이라고 개탄하는 사람이 많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앞장서기 이전에 정부.정치권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요하고 있다는 말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런 반응에 대해 억울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정부가 기업에 대해 언제 사회적 책임을 강요했느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노 정부의 진심(?)과 관계없이 대부분 기업은 정부가 사회적 책임을 강요하고 있다고 느낀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기업 브랜드를 강화하거나 브랜드에 대한 반감을 약화시키기 위한 취지가 아니라 정부.정치권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하는 사회적 책임 활동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 그런 사회적 책임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세정 경제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