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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대한제국의 황실 … 우린 뭘 알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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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정범준 지음, 황소자리
560쪽, 3만5000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황제와 황태자의 어진영(御眞影)을 불태워 버렸다. 사진 속의 황제는 단발을 했으며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어진영을 소각한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황제가 곤룡포를 벗고 군복을 입었으리라고는, 더욱이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구중궁궐에 머물러 있는 황제의 모습을 함경북도 시골 사람들이 대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909년 6월 26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이들의 거친 행동을 질타하며 '무엄한 촌맹'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게 10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의 우리 역시 대한제국 황실의 흐름과 삶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동안 대한제국과 고종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진척을 이뤘지만, 고종 일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극히 부진했다. <부속기사 참조> 우리는 기껏 TV 드라마 '궁'같은 사극으로 재구성된 이미지나, 부정확한 황실 관련 다큐멘터리에 만족해왔는지도 모른다. 서울대 국문학과 출신의 저술가 정범준(36.관훈클럽 근무)이 쓴 '제국의 후예들'은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소문 속의 황실'을 복원해낸 문제작이다.

저자는 딱딱한 학술서가 아닌 평전 형식을 취하며 황실 100년사를 재구성한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황실에 관한 수백 권의 문헌과 신문·잡지, 그리고 황실 인물들에 대한 치밀한 인터뷰를 거쳤다. 지난해 7월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이구의 운구 도착 얘기로 이 책은 시작한다.

“그가 일본에서 떠돌다 생을 마쳐야 했던 까닭은 무엇인가”를 묻는 이 책은 100년 전 황실을 우리가 얼마나 몰이해와 편견으로 바라보았는가를 자문하게 만든다. 일테면 일본이 대한제국의 혈통을 끊기 위해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일본의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를 강제결혼시켰다고 믿거나, 덕혜옹주의 일본인 남편인 소 다케유키가 애꾸눈이었고, 그에게 맞아 유산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라는 게 이 책 주장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이방자의 일본어 평전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1989년 번역본 출간) 등에서 노출돼온 “이방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라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또 덕혜옹주는 남편 폭행으로 유산하지도 않았다.

“(이런) 무수한 비화들은 고종 독살설처럼 제법 근거가 있는 것도 있지만 전혀 사실무근인 것도 적지않다”(175쪽)는 것이다.

이러한 낭설은 나라를 빼앗긴 억울한 감정에서 나온 감상적 민족주의때문이다. 이 책은 황실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전부일까? 그건 아니다. 『제국의 후예들』의 매력은 황족 이전에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제국주의 폭력에 억압당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일선융화(日鮮融和)의 목적으로 자행된 황족의 정략결혼, 즉 이은과 이방자, 정신분열증을 알았던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이건과 마츠다히라 요시코….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조선의 황족을 일본군의 장교로 양성하여 전장 속으로 몰아 넣었던 일제의 이빨 자국을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실 제국주의 폭력은 식민지를 살아가야 하는 조선 땅 민중들과 연결돼 있다. 황족의 정략결혼은 1920년대 총독부에서 식민지정책으로 추진한 조선 민중들의 내선결혼(內鮮結婚)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황족들의 참전은 조선 민중들을 전장 속으로 동원하기 위한 일종의 모범 케이스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황족의 정략결혼과 참전은 식민지 조선을 경영하기 위한 일본의 정책이었던 셈이다. 『제국의 후예들』은 황족과 황실이라는 특수집단의 삶에 주목하고 있지만, 이는 ‘한 몸으로 두 세상을 살아가야만 했던’ 지난날 민중들의 이야기와 겹쳐진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왕족과 민중이라는 이분법적인 역사 서술을 넘어,‘지금 여기’서 진행 중인 폭력까지 읽어내는 지혜를 보여준다.

이승원 <저술가·『학교의 탄생』의 저자>

■ 대한제국 황실을 다룬 다른 책들

대한제국 황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 자서전.전기류를 포함해 그간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이방자의 '지나온 세월'(여원사, 1969년), '세월이여 왕조여'(정음사, 1985년)등과 민갑완의 '백년한'(문선각, 1962년) 등은 자서전에 속한다. 또 김을한의 '인간 영친왕'(탐구당, 1981년), 안천의 '황실은 살아 있다'(인간사랑, 1994년)처럼 황실 인물들을 다룬 평전류의 책도 부분적으로 선보였다.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일지사, 1983년), 김유경의 '옷과 그들'(삼신각, 1994년) 등 황실 풍속사 연구도 평가받는다. '제국의 후예들'은 이런 성과를 뛰어넘는 '황실의 일상사'이자, 황실 사람들 전체를 포괄한 집단의 평전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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