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국회의원급 국회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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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조의 관직표를 보면 품계가 정연하다. 영의정과 좌·우의정의 삼정승은 정1품이고 6조의 판서(장관)는 정2품이다. 수도 한성의 판윤(시장)은 판서와 같은 정2품이고 각도의 관찰사(도지사)는 6조의 참관(차관)과 같은 종2품이다.
무관의 경우는 한성을 지키는 오위 도총부의 도총관이 정2품이고, 지방의 법마절도사는 종2품이며, 수군절도사는 정3품이다.
정1품부터 종9품까지 l8품계에 동서양반의 모든 관직이 정연하게 짜여져 있는 것이다. 심지어 종친과 임금의 후궁까지도 모두 품계가 있다. 종친 중 군호를 가진 사람은 정1품∼종2품, 도정과 정은 정3품, 부정은 종3품이다. 내명부인 후궁에도 품이 있어 빈은 정1품, 귀인은 종1품, 소의는 정2품…숙원은 종4품 하는 식이다. 문 무관의 부인인 외명부도 남편의 품계에 따라 정경부인(1품), 정부인(2품)하는 식의 직첩을 주었다.
이렇게 품계가 정연하지만 직책에 따른 권위와 위세가 꼭 품계의 높낮이에 비례하지는 않았다. 동일한 품계라도 문 무관간에 차이가 컸고, 같은 문관의 경우도 직책에 따라 허실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임금의 신임이 권세의 결정적 요소였다.
이러한 계급전통은 신라의 골품제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회의원들이 그토록 장관급 대우에 집착하는 것도 오랜 전통에 비춰 이해 못할 일은 아닌 셈이다.
우리의 길지 않은 헌정사에는 국회와 정부간에 의원대우를 둘러싼 암투의 역사가 점철되어 있다. 국회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3공화국까지는 의원대우가 장관급이었다. 그러다 유신 후 비상국무회의에서 국회의원의 보수를 차관급 밑으로 깎아 내린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국회의원 모두가 불만이었기 때문에 국회의 다음해 예산심의 때 의원세비가 장관급보수로 원상 회복된다.
그러나 5공화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입법회의에서 의원대우는 다시 차관급으로 격하된다. 9대 국회 때처럼 쉽게 원상회복하지 못하도록 국회의원 수당에 관한 법을 고치면 그 국회의 임기 중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조항까지 둔다. 이번 6공화국의 국회는 그 조항까지 없애 의원 대우를 일거에 다시 장관급으로 원상 회복시킨 것이다.
이러한 엎치락뒤치락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딘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보수가 높아야 직급이 높고 직급이 높아야 권위가 선다는 단순논리가 너무 뿌리깊게 박혀있는 듯 하다.
일반행정공무원과 국회의원 및 법관의 보수체계는 똑같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것이 자연스럽다. 외국의 경우도 대개 다 그렇고 우리 나라에서도 다르게 하기 위해 국회의원과 판·검사의 보수에 관해서는 별도의 법률이 제정되어있다.
국회의원은 정치인이기 때문에, 판·검사는 공정하고 독립된 재판수행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 높은 보수를 보장하는 별도의 보수체계 마련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의 경우도 판사의 보수가 높아 대법원판사는 부통령과 하원의장 보다도 연봉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일부러 별도체계를 만들어 놓았는데도 구태여 일반공무원의 직급체계에 맞추어 지체를 비교 평가하려는 습성이 있어 큰 문제다.
국회의원을 장관급이니, 차관급이니 하고 따지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국회의원은 어디까지나 국회의원이고 국회의원급일 뿐이다.
국회의원의 보수는 의원직이 겸업의 명예직이냐, 전업이냐, 보조요원을 국회에 두느냐, 개인에게 붙여주느냐 하는 나라마다의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의원을 명예직으로 보는 영국의 의원보수는 행정부 국장 비슷하고, 겸업을 원칙으로 하는 프랑스는 보수가 차관급에 준 한다. 의회자체의 보좌시스템이 갈 되어있는 미 일 에선 차관 비슷한 보수를 받는다.
영국하원의원이 국장봉급을 받는다해서 영국의 의원권위가 국장급이라고는 아무도 보지 않으며 영국하원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 외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강력한 권위를 지키고 있다. 반면 유신시대 우리 나라 국회의원의 보수가 장관급이라 해서 그때의 국회가 권위가 있었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의원 개개인을 봐도 거의 대통령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닌 의원이 있는가하면, 과장급만도 못한 국회의원도 없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결국 국회와 의원의 권위는 국회 및 의원이 하기에 달린 것이지 보수의 높낮이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이런 사정은 판·검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높은 보수를 보장하기 위해 별도체계를 만들었더니 그 높은 보수체계를 마치 직급이 높은 것처럼 생각하는 불 합리를 낳고 있다. 같은 행정부내에서도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5급 공무원이 되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한 초임 검사는 봉급이 높아 4급 대우로 통한다. 고등검찰관이 되면 벌써 1급으로 통하고 검사장은 차관급, 고등검사장은 차관급이상이다.
그래서 법무부에선 고등검찰관인 과장이 되면 타 부처보다 3개 직급이 높은 1급이고, 검사장인 국장부터 차관까지가 모두 같은 차관급이란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모두 보수와 직급, 직급과 권위를 혼동한데서 빚어진 현상이다. 민주시대의 공직을 18품계적 낡은 틀에 맞추려 해선 불 합리만 심화시킨다.
국회와 사법부가 행정공무원과 급을 따져 무엇하겠는가. 역사와 헌법이 맡긴 고유 기능을 훌륭히 해내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저절로 더하여질 것을. <성병욱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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