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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설사” 알린 메르스 감염자, 공항검역관이 그냥 보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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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메르스 발생] 구멍 뚫린 검역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진자 A씨(61)가 공항 검역소에서 귀국 전 메르스 주요 증상인 설사를 앓았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검역소는 그를 그냥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해외 유입 감염병을 막는 첫 단추인 공항 방역망이 뚫렸다.

몸 안 좋아 휠체어 타고 입국 신고 #검역관, 당국 메르스 지침 안 따라 #현지 병원 방문 여부 등 묻지 않아 #격리 대상 환자 택시 타고 병원 가

9일 질병관리본부(이하 질본)에 따르면 A씨는 지난달 16일 쿠웨이트로 출장을 떠났다가 두바이를 경유해 이달 7일 오후 귀국했다. 이날 오후 4시51분 인천국제공항에 내린 A씨는 착륙 직후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휠체어를 요청해 입국 게이트부터 공항을 떠날 때까지 휠체어로 이동했다. A씨는 공항 검역소에 ‘건강상태질문서’를 제출했다. 중동 지역 여행객은 귀국할 때 질병 의심 증상 등을 기록한 질문서를 내야 한다. 질본 지침에는 메르스의 주요 증상을 발열, 기침, 호흡기 증상, 인후통, 구토·설사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침대로라면 검역소는 A씨에게 현지 의료기관 방문 여부, 메르스 의심·확진 환자 접촉 여부, 낙타 접촉 이력 등을 물었어야 한다. 한 개라도 해당하면 의심환자로 분류하고 즉시 국가지정격리병상에 입원·격리 조치해야 한다.

A씨는 지난달 28일 쿠웨이트 현지 병원에서 설사 진료를 받았다. 병원은 메르스 주요 감염 장소다. 한국에서도 2015년 186명의 환자 중 178명(96.2%)이 병원 내 감염이었다. 게다가 당시 A씨는 비행기에서 내린 뒤 휠체어로 이동해야 할 만큼 쇠약한 상태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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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 질본 검역지원과장은 “A씨의 몸 상태를 본 검역관이 의심스럽게 보고 다른 증상은 없냐, 약을 먹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지금은 괜찮다’고 말해 통과시키면서 14일 이내 의심 증상이 나타나면 신고하라는 내용의 안내문을 건넸다”고 말했다. 질본은 주증상인 발열과 호흡기 증상이 없어 설사 하나로 메르스를 의심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2015년 감염자 가운데 25.8%는 발열 증상이 없었다. 기침(17.7%), 가래(7.5), 호흡곤란(5.4%) 등 호흡기 증상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반면 복통·설사 등 소화기 증상을 호소한 감염자가 12.9%에 달했다.

질본보다 환자가 더 현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A씨는 마중 나온 부인과 함께 리무진형 택시를 타고 삼성서울병원으로 향했다. A씨는 이동 중에 병원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복통과 설사를 앓고 있고, 중동에 다녀왔다고 알렸다고 한다. 그는 귀국 2시간여 만인 7일 오후 7시22분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측은 진료 뒤 폐렴 증상 등이 확인되자 A씨를 메르스 의심 환자로 보고 오후 9시34분쯤 보건당국에 신고했다. A씨는 8일 0시33분 국가지정격리병상인 서울대병원에 옮겨졌고, 8일 오후 4시쯤 메르스 양성으로 확인됐다. 공항 검역소를 통과한 지 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것이다.

만약 A씨가 버스·지하철을 탔거나, 삼성서울병원으로 바로 가지 않고 집으로 가서 활동을 계속하거나, 설사 치료를 하느라 동네병원을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오명돈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A씨가 집으로 가거나 연락 안 하고 설사병 진료를 여기저기서 받았으면 3년 전과 비슷한 사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A씨가 최선의 판단으로 최선의 조치를 했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감염병을 막는 데는 보건당국과 의료기관의 노력 못지않게 시민의 현명한 대응이 중요하다. A씨의 대응은 적절했다”고 덧붙였다.

만약 공항 입국 단계에서 A씨를 격리했다면 공항에서 음압시설(바이러스 차단 시설)이 된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대병원으로 이동했을 터이고, 그러면 출입국심사관, 의료진 4명, 가족, 택시 기사 등은 밀접 접촉자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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