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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장하성 실장, 마지막 폴리페서가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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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깊은 지식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지만 배우 출신의 대통령 당선인은 이렇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권력은 위험합니다. 또한 권력과 너무 동떨어진 지식은 공허한 것입니다.” 1980년대 미국 보수 혁명을 주도한 레이건 대통령은 워싱턴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대학교수 → 대선 캠프 → 청와대의 #한국형 권력-지식 관계는 끝내야 #캠프보다 공적 책임을 지는 #정당연구소가 중심이 돼야 한다 #지식의 열린 네트워크에 접속해 #삶의 현장과 치열하게 소통해야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낯선 경제이론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안, 필자는 우리가 이제는 권력과 지식의 낡은 관계 모델을 버려야 할 때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최저임금 상승이 소비 증가와 경제성장을 언제, 얼마나 가져올지를 치밀하게 논쟁하는 것은 경제 전문가들의 몫이다. 다만 필자는 소득주도 성장 논쟁을 불러온 장하성 정책실장의 사례를 지켜보면서 사회적으로 이름난 대학교수들이 청와대 고위 참모나 내각으로 직행하는 한국형 권력-지식 관계는 이제 끝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투명성도, 책임성도 없는 대학교수 중용 모델을 버리고 분산형 지식 네트워크에 기반한 새로운 권력-지식 관계를 만들어 갈 때다.

방대한 경제, 사회정책을 조율하는 청와대 정책실장 자리에 행정경험이 전무한 장하성 교수가 중용된 자세한 경과를 필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우리가 익히 보아 온 권력-지식의 통로를 거친 것만은 분명하다. 낡은 모델의 표준 경로는 이렇다. (1) 현실참여 욕구가 강한 대학교수들의 사회적 지명도 획득 (2) 지명도를 바탕으로 대통령 후보 캠프에 참여(혹은 비선으로 정책자문) (3) 지지 후보가 당선되면 장·차관 또는 청와대 고위 참모로 직행.

이 모델이 투명성·책임성은 고사하고 심지어 대통령의 권력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이유를 하나씩 짚어 보자. 첫째, 대학교수들이 사회적 지명도를 얻는 과정과 정교한 정책지식은 거의 관계가 없다. 방송 출연과 기고가 잦을수록 (혹은 시민단체를 이끌면서) 지명도는 올라간다. 하지만 미디어나 시민단체가 교수들로부터 원하는 것은 복잡한 현실을 꿰뚫는 지식, 살아 있는 정책지식이 아니다. 쉽고 단편적인 주장이 훨씬 미디어 친화적이다. 심지어 진지한 토론과는 거리가 먼 140글자의 트위터로 수십만 명의 팔로어를 거느리기도 한다. 달리 말해 수십 년 갈고닦은 전문지식과 현실 적합성이 지명도 있는 대학교수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장훈칼럼

장훈칼럼

둘째, 대통령 선거는 지명도 있는 대학교수들이 권력에 다가갈 좋은 기회다. 후보들은 막대한 국민 세금의 지원을 받는 정당의 정책연구소들을 제쳐놓은 채 대선 캠프에 모여든 폴리페서들을 중심으로 선거공약을 서둘러 만들어낸다(정당 정책연구소들은 정책수립보다는 여론조사에 더 힘을 쏟아 왔다).

캠프에서 이뤄지는 공약의 개발 과정은 물론 불투명하다. 게다가 폴리페서들로 북적이는 캠프에서 지식의 현실적합성-즉 의도하는 정책목표와 예상되는 효과, 부작용에 대한 정밀한 검토와 도상 훈련이 설 자리는 없다. 그보다는 캠프를 이끄는 대통령 후보의 득표력이 정책공약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지난 대선 때 각 캠프에서 내놓은 최저임금 공약이 서로 엇비슷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지식의 전문성보다는 선거논리에 충실한 교수들이 캠프 안의 권력투쟁에서 살아남는다. 생존자들은 선거가 끝나면 수십 년간 정책을 매만져 온 관료들을 지휘하는 내각이나 청와대로 직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생전 처음 대면해 보는 정책 현장에서 “지식(?)의 실험”에 나서게 된다.

이 오래된 모델은 이제 개방적이고 책임성을 갖춘 권력-지식 생태계로 바뀌어야 한다. 먼저 책임성을 위해, 권력이 지식을 공급받는 통로는 불투명한 대선 캠프가 아니라 예산과 활동 내역이 공개되고 공적 책임을 져야 하는 정당연구소가 중심이 돼야 한다.

연간 수십억원의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정당연구소는 또한 각 분야의 “저명한” 대학교수들에게 의존하기보다 지식의 열린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구글, 네이버, 페이스북, 유튜브 덕분에 대학과 교수들의 지식 독점은 진작 막을 내렸다. 살아 있는 지식을 공급받으면서 권력이 생존하려면 권력은 이제 각 분야의 전문가(라기보다는 현장의 고수)들이 살아 숨쉬는 네트워크에 접속할 때다. 이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순간 정치권력은 삶의 현장과 치열하게 소통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과 더불어 살아 숨쉬는 지식을 장착하게 된다.

#네트워크가 지식이다. #네트워크가 권력이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