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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에 '뇌전증 없다'하면 속수무책…운전면허 결격심사 구멍

중앙일보

입력

운전면허시험장 전경. [중앙포토]

운전면허시험장 전경. [중앙포토]

"뇌전증 환자 본인이 질환을 가진 사실을 숨기면 사실상 걸러낼 방법이 없습니다."

지난달 16일 대구경찰청은 뇌전증을 가진 환자 25명을 무더기로 적발했다. 뇌전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진 채 운전면허를 취득했다는 이유다. 이들은 운전면허시험에 응시할 때 뇌전증 여부를 묻는 질문에 '없음'이라고 기재했다.

뇌전증은 신체적 문제가 없는데도 신경세포 이상에 따른 발작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병을 말한다. 과거 '간질'이라고 불렸지만, 그 용어가 주는 사회적 낙인이 심해 2009년 뇌전증으로 용어를 바꿨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국내 뇌전증 환자는 13만7760명이다.

환자 양심에 맡겨진 뇌전증 보유 여부 확인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신체 활동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특성 때문에 뇌전증 환자는 운전면허 취득에 제한을 받는다. 도로교통법 제82조 1항 2에는 '교통상의 위험과 장해를 일으킬 수 있는 정신질환자 또는 뇌전증 환자'는 운전면허를 받을 수 없다고 규정돼 있다. 다만 최근 2년간 뇌전증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전문의 소견서를 갖고 도로교통공단 운전적성판정위원회의 판정을 받으면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하다.

운전면허 응시원서에 있는 질병·신체에 관한 신고서. 뇌전증 등 신체적·정신적 문제가 있을 경우 이를 직접 체크해야 한다. 대구=김정석기자

운전면허 응시원서에 있는 질병·신체에 관한 신고서. 뇌전증 등 신체적·정신적 문제가 있을 경우 이를 직접 체크해야 한다. 대구=김정석기자

뇌전증뿐 아니라 치매, 조현병, 분열형 정동장애(기분장애), 양극성 정동장애(조울병), 재발성 우울장애, 정신발육지연(지적장애), 마약·대마·향정신성의약품·알코올 관련 치료대상자, 그 밖의 정신질환, 색채식별 이상, 청력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는 신체 장애 등 신체적·정신적 문제가 있을 경우 이를 응시원서에 체크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절차는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병무청·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질환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기관이 개인정보 침해를 이유로 경찰청이나 도로교통공단에 관련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서다. 예외적으로 건강보험공단이 6개월 이상 입원 치료 중인 뇌전증 환자에 한해 질환 보유 사실을 통보하고는 있지만, 뇌전증 환자가 6개월 이상 입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제도 허점 악용 다반사…법률개정안은 1년 넘게 계류 

결국 운전면허 취득 과정에서 뇌전증 보유 여부는 질환자 본인의 '양심' 외에는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는 셈이다.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제도적으로 뇌전증 질환자를 걸러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본인이 뇌전증이 없다고 응시원서에 체크하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무더기로 적발된 뇌전증 질환자들도 이런 제도적 허점을 악용해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대구경찰청 임선제 교통범죄수사팀장은 "입건된 운전면허 부정취득자들 대부분이 '몰랐다'고 진술하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운전면허 응시원서에 '허위사실을 적을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는 문구가 있어 알면서도 질환 사실을 숨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뇌전증 사실을 숨기고 운전면허를 취득했다가 대형 교통사망사고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2016년 7월 부산시 해운대구에서 A씨(당시 53세)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3명이 숨지고 20명이 다쳤다. A씨는 사고 1년 전 뇌전증 진단을 받았지만, 운전면허를 갱신하면서 그 사실을 숨겼다.

2016년 7월 31일 부산시 해운대구 도심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당시 폐쇄회로TV(CCTV)에 잡힌 장면. [사진 부산경찰청]

2016년 7월 31일 부산시 해운대구 도심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당시 폐쇄회로TV(CCTV)에 잡힌 장면. [사진 부산경찰청]

뇌전증 환자가 대형 교통사망사고를 낸 직후 부적격 운전자 관리를 강화하는 법률개정안이 발의됐다. 사고가 난 부산시 해운대구를 지역구로 둔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해 3월 21일 이런 내용의 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엔 운전면허 결격자를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 공개를 할 수 있도록 하고, 2종 운전면허를 받은 사람도 1종 운전면허를 받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면허 갱신 때 적성검사를 받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사고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면서 이 법률개정안은 1년 6개월 가까이 잠들어 있다. 대구경찰청 관계자는 "지금 제도로는 뇌전증 환자가 실제 사고를 낸 뒤에야 운전자가 운전면허를 부정 취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경찰청이 관련 기관에 최대한 협조 요청을 하고 있지만, 환자 개인정보를 함부로 공유할 수 없는 만큼 법률 개정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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