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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오직 ○○를 위해”×40, 듣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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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청와대 홈페이지가 달라졌다. 세련됐다. 권력의 무게가 안 느껴진다. 때로는 엄숙함도 던져버린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의 헌법재판소 창설 30주년 기념사 소개는 요즘 유행하는 낚시성 유튜브를 닮았다.

한번의 선거로 모든 헌법기관 #한꺼번에 뒤집어져선 안 돼 #선거 통한 대의기관 존중하고 #국민 핑계 대지 말고 협치해야 #너무 앞서면 국민 못 따라오고 #국민 따라만 가면 리더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헌법기관들에 40번이나 반복한 이 말은?

“오직 ○○를 위해”×40

헌법기관 듣고 있나?

정말 상투적인 낚시성 제목이다. 큼지막한 그래픽용 글자로 띄워놓은 것부터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낚싯밥을 던진 건 아니라고 믿는다. 망가지더라도 국민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좋은 일이다. 더구나 ‘오직 국민을 위해’라니…. 청와대 게시물에 어울리지 않은 파격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정부 들어 홍보·이벤트들이 친근하고 편안해졌다. 그걸 보는 국민이 즐겁고, 주인으로 참여하는 느낌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발전이다.

그런데 뭔가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 ‘헌법기관 듣고 있나?’라니. 그 자리에는 5부 요인이 다 참석했다. 문 대통령도 “입법·사법·행정부와 헌법기관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계신 분들과 함께… 자리를 갖게 되어서…”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홍보 문구대로라면 문 대통령이 다른 헌법기관장들을 불러모아 훈계를 하는 듯하다. 헌법기관들의 위에 서 있는 교사, 초월적 권력자의 인상을 풍긴다.

우리 헌정사는 대통령에 의해 삼권분립의 균형이 끊임없이 위협받았다. 특히 1972년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이 아니라 그 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 ‘영도자’로 자리를 매겼다. ‘제왕적 대통령’ 논란은 아직도 계속된다. 그렇지만 유신 시절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렇게 견고하게 영구집권의 터를 잡아놔 봤자 얼마나 갔나. 영원한 권력은 없다. 얼마나 허망한가.

김진국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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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걱정일 수 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했다. 파격과 코드 논란을 부른 인사였다. 국회의장 선출, 집권당 대표 선거에서도 ‘문심’(문재인 대통령 의중)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도 자기 손을 거친 사람인데 내 사람이라는 느낌이 왜 없겠나. 그렇다고 그 일이 내 일은 아니다. 모두 ‘적폐 청산’이란 한 방향으로 끌고갈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털어낼 수가 없다. 이런 마당에 ‘훈계’라니….

국정이 삐걱거리거나 국회가 교착돼도 나라가 갑자기 망하지 않는다. 국민이 흔들리지 않고 예측 가능한 안정을 누리는 것은 독립된 헌법기관들이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경찰이 정치적 반대자만 집요하게 쫓아다니고, 법원 판결이 정권마다 혹은 판사마다 달라진다면 국가의 신뢰와 권위는 설 땅이 없다.

국민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 사법부다.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나라 살림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통계다. 아무리 안에서 지지고 볶더라도 외교·국방 문제에서는 하나가 된다. 그 모든 근본이 한 번의 선거로 이리저리 프라이팬의 생선 뒤집듯 하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또 한 가지는 국민이다. “‘오직 ○○를 위해’×40”. 정말 연설문을 세어봤다. ‘국민훈장’이라는 표현 한 번까지 포함하면 그 짧은 연설문에 정말 ‘국민’이란 단어가 40번 반복됐다. 문 대통령의 ‘국민’ 강조는 알아줄 만하다. ‘기·승·전 국민’이다.

과거 공무원과 정치인들은 기자들에게 불평했다. “언론이 ‘국민’을 들어 비판하는데, 그게 무슨 국민이냐”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문 대통령은 임기 초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했다. ‘국민’을 들먹여도, ‘우리 이니’ 생각이 국민 생각이라 해도 군소리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지지율이 높다고 끝이 아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다 포기해야 하나. 심지어 제도화되지 않은 공론화에 중요 정책 결정을 맡기려는 게 이 정부다. 공론화가 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공론화를 가장한 여론조사로 모든 걸 결정하겠다는 것은 공론화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선거다. 선거로 뽑아놓은 대의기관을 무력화하는 건 반헌법적 발상이다. ‘기·승·전 국민’이 아니라 ‘기·승·전 국회’다. 더구나 문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50%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이제야말로 ‘협치’를 모색할 때다. 그런 점에서는 올드 보이들의 귀환이 다른 길을 막아버리지만 않는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 “정치인은 국민보다 반 발짝만 앞서가라”고 말했다. 너무 앞서가면 국민이 따라오지 못한다. 그렇다고 국민을 따라만 가면 리더가 아니라는 말이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