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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끝이 중요 … 나는 결말부터 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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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호 24면

문화소통포럼 참석한 만화 ‘원더우먼’ 스토리 작가 에이미 추

에이미 추가 스토리 작가로 참여한 슈퍼히어로물 만화책 ‘원더우먼’(맨 왼쪽) ‘포이즌 아이비’(가운데·이상 DC코믹스)와 록밴드 만화 ‘키스’(다이너마이트 엔터테인먼트)

에이미 추가 스토리 작가로 참여한 슈퍼히어로물 만화책 ‘원더우먼’(맨 왼쪽) ‘포이즌 아이비’(가운데·이상 DC코믹스)와 록밴드 만화 ‘키스’(다이너마이트 엔터테인먼트)

최근 ‘원더우먼’ ‘데드풀’ ‘앤트맨’ 코믹스의 스토리 작가로 활약하고 있는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 추(Amy Chu·50)는 이력이 독특하다. 이런 작가들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만화광인 것과 달리 그는 만화에 큰 관심이 없는 ‘범생이’였다. 웰즐리 대학과 MIT에서 각각 동아시아학, 건축 설계를 전공하고 하버드에서 MBA를 수료했다. 그런 그가 만화와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면서부터. MBA 동기 조지아 리(Georgia Lee)가 설립을 구상 중이던 만화 출판사의 자문을 맡게 되면서 뒤늦게 만화의 매력에 빠져든 것이다. 그는 결국 조지아 리와 함께 만화 출판사 ‘알파 걸 코믹스(Alpha Girl Comics)’의 공동창업자가 된 것(2011년)은 물론, 아예 만화 스토리 작가의 길까지 걷게 되었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이사장 최정화)이 전세계 문화예술계 리더를 매년 한국에 초청하는 문화소통포럼(CCF)에 올해 미국 대표로 참석한 그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만났다.

에이미 추가 공동대표로 있는 만화 출판사 ‘알파 걸스 코믹스’에서 발행한 만화책 ‘걸스 나잇 아웃’(Girls Night Out)과 ‘VIP 룸’(The VIP Room)

에이미 추가 공동대표로 있는 만화 출판사 ‘알파 걸스 코믹스’에서 발행한 만화책 ‘걸스 나잇 아웃’(Girls Night Out)과 ‘VIP 룸’(The VIP Room)

“철저한 생각의 훈련은 좋은 스토리텔링에 필수적입니다.”
에이미 추는 경영 컨설턴트로 근무하며 다양하고 참신한 생각을 훈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화 업계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슈퍼히어로 만화에 무관심했던 게 오히려 캐릭터를 “색다른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것이다. 특정 캐릭터가 가진 기존 틀에서 자유로웠던 덕분에 독창적인 방식으로 캐릭터에 과감한 변화를 줄 수 있었고, 이는 독자층 확대로 이어졌다.

그가 전업 만화 스토리 작가로 발을 들인지는 겨우 3년. 하지만 그는 이미 주요 미국 만화 출판사에서 다수의 세계적인 슈퍼히어로물을 집필하며 남성 위주의 코믹스 업계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여성을 섹시하게 그려야 만화책이 팔린다는 것은 이제 옛날 이야기… 여성 캐릭터 그리는 방식 바뀌어야 만화 산업도 발전

에이미 추(오른쪽 네 번째)가 창덕궁에서 CICI 최정화 이사장(오른쪽 다섯 번째)및 각국 대표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에이미 추(오른쪽 네 번째)가 창덕궁에서 CICI 최정화 이사장(오른쪽 다섯 번째)및 각국 대표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에이미 추에게 좋은 이야기를 집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아시아계 여성 만화 작가로서 더 많고 다양한 신진작가들이 업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만화 업계는 아직까지 남성 중심적입니다. 게다가 기존 작가들이 업계를 독차지하고 있기에 신진 작가들이 진입하기에 장벽이 무척 높죠. 저는 업계에 다양성을 키워나가기 위해 신진작가들이 ‘걸스 나이트 아웃’으로 유명한 ‘알파 걸 코믹스’에 짧은 만화를 출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 만화에 성별이나 인종, 연령의 다양성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원더우먼’ ‘데드풀’ ‘앤트맨’ 같은 세계적인 히트작을 집필했다. 이야기에 독특한 시각을 불어넣음으로써 팬들에게 긍정적인 호응을 받았는데, 좋은 스토리를 쓰는 비결은.  
“스토리를 익숙한 방식으로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기존의 방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시도한다. 이런 접근이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을 창조하기보다는 독자들이 익숙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이야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는다. 친숙함을 느끼지 못하면 독자들은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크게 신경 쓰는 또 다른 부분은 결말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결말에 받은 느낌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스토리를 평가한다. 결말에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어떻게 시작할지는 분명한 아이디어가 있지만 어떻게 마무리할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항상 결말부터 시작한다.” 
‘포이즌 아이비’ ‘레드 소냐’ 등 지금까지 집필한 대다수의 작품이 여성 히어로가 중심이다.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스토리를 집필하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고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나.  
“대부분 여성 캐릭터를 작업하고 있지만 여성 캐릭터만 작업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만화 업계는 굉장히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은 여성 캐릭터만 제안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는 ‘데드풀’과 ‘앤트맨’ 이야기를 집필했지만, 이는 나에게 제안한 에디터들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성 캐릭터에 관해서도 쓰고 싶다. 때문에 남성 슈퍼히어로인 그린 호넷이야기를 집필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바로 승낙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여성 그린 호넷이었다. 물론 이야기가 흥미롭기 때문에 작업 과정은 굉장히 만족스러웠지만, 여성 작가도 남성 작가 못지 않게 남성 슈퍼히어로 얘기를 멋지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문화소통포럼(CCF) ‘문화소통의 밤’에 미국 대표로 참석한 만화 스토리 작가 에이미 추가 방한 소감을 말하고 있다.

문화소통포럼(CCF) ‘문화소통의 밤’에 미국 대표로 참석한 만화 스토리 작가 에이미 추가 방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전세계적인 ‘미투’ 운동 이후 만화업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미투 운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만화업계에 진출했지만, 여성에게 우호적이지 못한 환경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이 업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굳이 미투 운동 이후 나타난 변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난 몇 년간 여성 에디터의 수가 급증했다. 아직까지도 시니어 에디터는 대부분 남성이지만 채용할 권한을 가진 여성 에디터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만화 속 여성 캐릭터 중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하고 선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장면이 많다. 그들은 매력 넘치는 외모를 무기 삼아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은데, 이는 결국 여성에 대한 편견을 악화시키고 여성은 일도 잘하고 아름답기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을 심화시키는 것 같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는 내가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다. 다행히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용인하는 오랜 관행을 통제할 수 있는 여성 에디터의 수가 증가하고 있음에 따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아티스트의 드로잉 스타일이 바뀌어야 한다. 많은 만화 아티스트들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그림을 그리는데 익숙하다. 그 방식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성을 그렇게 묘사해야 만화책이 잘 팔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만화를 읽는 여성 독자층이 확장됐고, 그들은 기존에 여성이 묘사되었던 방식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많은 남성 독자들 또한 이에 싫증을 느끼고 있다.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할 수 없고, 이는 결국 만화 산업의 성장 정체로 이어질 것이다.”  
만화에 백인이 아닌 캐릭터의 비율을 높이는 것 또한 해결해야 될 문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아시안 캐릭터는 주인공 옆의 찌질한 조연이거나 무술에 능통한 히어로다. 물론 한국계 미국인 헐크 아마데우스 조(Amadeus Cho)와 중국인 슈퍼맨 캐넌 콩 (Kenan Kong)이 있었지만, 그 숫자는 여전히 미미하다.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이 문제를 의식하며 작업을 하는가.  
“캐릭터 인종의 경우 작가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위에 언급한 아마데우스 조와 케넌 콩은 둘 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작업한 캐릭터다.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이야기를 쓸 때 가능한 아시안 캐릭터를 많이 넣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집필한 ‘포이즌 아이비’에서 주인공의 멘토는 필리핀 여성이다. 비아시아계 작가가 동일한 작업을 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윗선 개입이 심한 할리우드와는 달리 만화계에서 작가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비교적 더 크다. 이는 내가 만화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다.”  

글 진민지 기자 jin.minji@joongang.co.kr
사진 박상문 국장·에이미 추·CI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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