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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속결 치고 빠지기 … 증시 휘젓는 ‘멸치’ 잡힐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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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멸치가 떴다.”

피해 본 개미들, 청와대 청원까지 #거래소, 메릴린치 초단타매매 점검 #불공정 거래, 시장 교란 여부 조사

인터넷 주식 게시판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문구다. ‘멸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합병된 미국계 투자은행 메릴린치를 뜻한다. 발음이 회사명과 유사해 붙여진 별명이다.

메릴린치의 ‘단타’ 위주 투자 방식도 이 별명이 자리 잡는데 한몫을 했다. 메릴린치는 짧은 시간 안에 ‘치고 빠지는’ 특유의 투자 방식으로 유명하다. 특정 종목에 대량으로 ‘사자’ 주문을 한 다음, 주가가 오르고 다른 투자자의 추격 매수가 시작되면 다시 파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 때문에 소액 투자자의 피해가 많았고, 메릴린치는 개인 투자자 사이에서 경계 대상 1호로 떠올랐다. 변동성이 큰 코스닥 시장에서 ‘멸치가 뜨면 피하라’는 조언이 오갈 정도다.

한국거래소가 이런 메릴린치의 투자 행태에 대한 점검에 착수했다. 정석호 한국거래소 시장감시부장은 지난 22일 “메릴린치 창구를 통한 매매를 대상으로 전반적인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는 대량으로 단타 매매에 나서는 메릴린치의 투자 방식이 불공정 거래 행위, 시장 교란 행위 등 관련 법규 위반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주식을 짧은 시간 안에 사고팔아 수익을 챙기는 매매 기법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개인 투자자가 소액으로 단타 매매를 한다고 해서 처벌되지는 않는다. 메릴린치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는 건 메릴린치 단일 창구를 통한 거액의 단타 매매가 지난해부터 올해 들어서까지 여러 종목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뤄져서다.

이와 관련해 개인 투자자 사이에서는 대규모 헤지펀드가 메릴린치 창구를 통해 한국 증시를 교란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는 청와대 게시판에 “주가, 시세 조종을 하는 메릴린치를 제재해달라”는 국민청원까지 등장했다.

메릴린치의 매매가 집중된 건 주로 제약·바이오주(株)나 남북 경제협력 관련주 등 변동성이 큰 업종들이다. 코스피 대형 종목보다 거래량이 많지 않은 코스닥 종목의 경우 메릴린치 매수와 매도에 따라 가격이 크게 출렁이는 일이 잦았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사장은 “메릴린치는 ‘시스템 매매’ ‘퀀트 투자’ 등으로 불리는 알고리즘 매매 투자를 국내 증시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것 같다. 인공지능(AI) 기술을 기반으로 특정 투자 신호가 나오면 자동으로 매수·매도하는 형태다”라고 말했다. 퀀트 투자 기법을 쓰는 대규모 헤지펀드의 한국 증시 교란 의혹이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외신도 이 사안을 주목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현지시각) “한국 내 일반 투자자들이 메릴린치 같은 대형 증권사의 초단기 매매 행태를 따라잡지 못해 손실을 보는 사례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당국이 점검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번 점검이 처벌로 이어질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정석호 부장은 “표면적 행위만으로는 아직 위법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불공정 행위나 시장 교란 행위 여부는 실제 점검 결과가 나온 뒤에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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