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대한민국남편들아] 한잔 하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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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웅.'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기가 진동한다. 나는 그냥 내버려둔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문자 메시지의 내용과 발신자를 알고 있다. 밤 8시에 내게 문자 보낼 사람이 아내 말고 누가 있으며 아내가 보낼 메시지가 "어디야?"말고 무엇이 있을까.

아내의 질문은 풍수를 묻는 것이다.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그 처지와 입장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적어도 오늘 나의 운명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은 술집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우하다.

나는 경기도 안양에 살고 있다. 회사가 있는 강남에서 집까지 대략 한 시간 반쯤 걸린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시간을 사랑한다. 회사에서는 김 팀장이 등에 붙어 있고 집에서는 남편과 아빠가 머리와 어깨에 올라타 있어 나는 늘 숨이 차다. 회사와 집 사이, 그 한 시간 반쯤에 김 팀장도 남편도 아빠도 내려놓은 그냥 내가 살고 있다.

때때로 나는 그 시간을 좀 늘려보기도 한다. 옛 동료와 어울려 술을 나누며 자유를 호흡하는 오늘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아직도 바지 주머니에서는 휴대전화가 동요하고 있다. 나는 잠시 오뎅을 내려놓고 휴대전화기를 꺼낸다. 매너 모드로 설정해둔 휴대전화는 매너 없이 신경질을 부리며 진동한다.

폴더를 열자 "어디야?"라는 중복 메시지가 3중 추돌사고의 차량처럼 부딪치며 튀어나온다. "문 팀장 만나. 술 조금만 마시고 늦지 않게 들어갈게. 미안." 나는 문장마다 이모티콘을 남발하며 비굴 모드의 회신을 쓴다. 더 이상 아내로부터 메시지가 오지 않기를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기도하며 확인 버튼을 지그시 누른다.

하나님은 저 필요할 때만 드리는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또 문 팀장이야? 얼마 전에도 만났잖아."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지 않다. 한 달은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아내에겐 얼마 전이다. "사람이 좋잖아. 문 팀장은 진국." "좋으면 아주 그 사람이랑 같이 살아."

당분간 아내로부터 문자 메시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휴대전화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비로소 나는 진정한 자유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휴대전화가 조용해지자 나도 말수가 줄어든다. 흥겹고 활기차던 술자리도 어느새 시들해진다. 나는 어색과 불안을 안주 삼아 연거푸 술잔을 비운다.

술을 마시는 중에도 나는 점점 늙어가고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모아둔 돈도 집도 없는데 물가와 집값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치솟는다.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한데 아내와 아이들은 나를 믿고 있다. 나는 취한다. 어느 틈에 김 팀장과 남편과 아빠가 술 취한 내 등과 어깨와 머리에 올라타 있다.

테이블 위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뭐 해? 안 들어와?" 나는 회신을 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아내는 직접 전화를 걸어온다. "당신 정말 이럴래? 빨리 안 오고 뭐 해? 이럴 거면 차라리 이혼해." 나는 아내의 악다구니가 반갑다.

그런데 아내에게는 회사와 집 사이가 있을까. 김 선생과 아내와 엄마를 내려놓고 숨 돌리는 시간이 있을까.

김상득 듀오 광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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