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비극, 인간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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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88년 11월23일은 현대 한국정치사에 또 하나의 비극적 종지부를 찍는 날이 되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날 밝힌 대 국민 사과문이 국민을 납득시켰든, 못시켰든 간에 우리는 전직 대통령이 온전히 한 자연인으로서 퇴임 후의 생애를 보내는 전례를 못 만드는 세 번째의 경우를 보았다.
우리의 첫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씨는 퇴임 후 한달 만에 도망치듯 외국 망명길에 올랐고 18년간 권위주의 통치를 했던 박정희씨는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 막료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이번 전두환씨는 세 번째다.
이것이 누구의 잘 잘못이나 누구의 불행이 되는가를 따지기 전에 3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런 일을 세 번씩이나 보게되는 국민의 심정은 참담하다.
이것은 한국 정치사의 비극이자 한 정치인 또는 한 인간의 비극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비극이 다시는 없게 하고 이런 비극의 잠재적 요소나 가능성마저도 배제, 봉쇄해 나가는 일이 우리의 과제임을 더 할 수 없는 절실한 심정으로 확인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인이 없는 과가 없고 어제가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다. 전 전 대통령의 비극도 암울하고 부패했던 유신 말기적 상황에서 이미 그 씨앗은 배태됐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8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심화되고 증폭돼온 결과였다. 그가 말한 대로 5공과 그 친·인척의 모든 비리와 말썽들은 그에게 최종책임이 귀착되지만 40년의 우리 헌정사를 통해 내려오는 많은 부정적 요소가 상황적 여건이 됐음도 부인하기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전 전 대통령이 최종 책임을 시인하고 국민심판에 자신을 던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보지만 아울러 전씨의 이런 비극, 우리 정치사의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비극이 잉태할 소지가 있는 상황적 여건이나 요소도 청산, 봉쇄해야 하는 것이다. 그 같은 요소들은 아직도 법률적, 제도적으로도 남아있고 우리 의식 속에도 남아있다. 전씨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요소들의 추방과 청산을 다시 한번 다짐해야겠다는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사과문을 통해 5공 비리와 그의 일문이 저지른 비리들에 대해 깊이 사과하고 많은 의혹과 잘못의 궁극적 책임이 자기의 부덕과 불찰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국민심판도 자기가 모두 받겠다고 밝히고 속죄의 뜻으로 모든 재산과 정치자금 잉여 분의 사회환원을 선언했다.
숱한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한 비극적인 광주사태와 삼청교육대사건, 공직자와 언론인의 대량해직, 수많은 인권침해 등에 대해서도 침통한 어조로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했다.
이런 그의 시인과 사과로 이런 사건의 직접 당사자나 피해자는 물론 그 동안 5공 비리로 분노해온 국민의 감정이 다 풀리고 가라앉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5공 비리를 문제삼고, 진상을 규명해야한다는 열화 같은 국민여론은 그의 해명이나 사과만을 듣자는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진상을 밝혀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음으로써 이 땅에 법과 정의가 있음을 확인하고 법과 정의를 세움으로써 유사한 잘못의 재발을 막자는 데 더 큰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잘못의 최종적인 당사자로서는 마땅히 사과하고 잘못을 빌어야 옳다. 전 전 대통령의 사과문 발표와 일련의 조치는 그런 점에서 시기적으로 많이 늦었지만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조치로 문제를 어느 정도나마 진정시키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도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제부터의 문제해결에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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