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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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회 청문회에 나온 증인들의 최대 무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른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말은 어떤 문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기억에 없다』는 증언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속마음을 열어 보기 전에는 정말 그 진위를 알 길이 없다.
사람이 어떤 일을 기억하는데는 네 가지 과정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첫째는 기명.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일만 기억되는 경우다. 가장 효과적인 기명방법에는 분산 법이 있다. 적당히 쉬면서 일정 횟수 반복해 기명하거나 쉬지 않고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기명하는 경우다. 입시에 이골이 난 우리는 시험공부를 통해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둘째는 보유. 기명된 것이 필요에 의해, 또는 우연하게 떠오르는 경우다. 때로는 유행성 건망이 있다. 가령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사고시점 이전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는 보유가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셋째, 재생. 보유되어있는 과거경험이 어떤 기회에 생각나는 것을 가리킨다. 적극적으로 노력해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고, 별안간 떠오르는 경우, 또는 연상에 의해 나타나는 수도 있다.
재생기능은 두 가지 제약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기억 흔적들이 서로 엉키는 경우다. 비슷한 일들이 겹치면 기억이 흐릿해질 수 있다. 다른 하나의 제약은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조건에서만 기억되는 경우다.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은 기억이 쉽게 되지 않는다.
끝으로 재인. 과거의 경험을 두고 틀림없이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고 인지하는 경우다. 이것은 다른 표현기능을 통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다.
사람의 정신활동에 관계되는 신경세포는 약1백40억이나 된다. 이들은 20대를 절정으로 뇌의 활동을 지배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뇌 세포는 죽어가며 한번 죽은 뇌 세포는 재생되지 않는다. 기억력이 감퇴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기억의 과정들로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일도 있다.
격동의 시대, 정치의 핵심에 참여한 사람들이 엄청난 결단을 한 문제들은 오히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들을 놓고 『기억에 없다』고 잡아떼는 것은 국민의 눈엔 역사 앞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비굴한 모습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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