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닮은 글씨, 사람을 닮은 붓놀림

1978년 원곡서예상을 제정한 서예가 원곡 김기승 선생(1909-2000). [사진 원곡문화재단]

원곡 김기승 선생의 작품 '부활'. [사진 원곡문화재단]

원곡 김기승 선생이 창시한 원곡체로 쓴 성경구. [사진 원곡문화재단]

현재 한국 서단의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전시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3층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다. 원곡서예상 40주년 기념 수상작가전이다. 원곡서예상은 광복 이후 한국 서단을 이끌어온 서예가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이 1978년 제정한 것으로, 지난 40년간 한국 서단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계파를 초월해 서단의 다양한 그룹을 포용해왔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원곡서예상 40주년 수상작가전 #역대 수상자 40인 신작 한데 모아 #전통과 실험, 다채로운 풍경 주목

원곡서예상 1회 수상자인 신두영의 작품. [사진 원곡문화재단]

이번 전시엔 이 상을 제정한 원곡 선생의 유작 2점을 비롯해 제1회 원곡서예상 수상자인 신두영 작가에서부터 올해 수상자까지 총 40인 작가의 작품이 나왔다. 작고한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 모두 신작을 내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현재 한국 서단에서 각기 뚜렷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이 총집결한 자리”라며 “한글과 한자 서예는 물론 전서·예서·행서·초서와 실험 서예, 문인화 등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 한국 서단의 횡단면을 살펴볼 기회”라고 말했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작품은 제1회 수상자인 한글 서예가 신두영 작가의 글씨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옛 글씨체를 토대로 현대적인 재해석을 담은 서체에 맑은 기상이 서려 있다. 제2회 수상자이자 목인미술관 설립자인 전종주 작가는 회화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작품으로 눈길을 끈다. 붓의 운용 기법과 효과에 대한 실험을 멈추지 않고, 서예의 현대화를 이끌어온 작가의 의지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제19회 수상자인 허회태 작가의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진정한 예술이라면 전 세계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서예 기법에 감성을 담아 사물을 표현하는 작업을 해오며 현대미술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9회 수상자 허회태의 글씨. [사진 원곡문화재단]

제4회 수상자이자 원곡의 직계 제자인 김영기 작가는 굵고 힘찬 붓놀림으로 ‘비로봉’(毘盧峰)이란 작품을 선보였다. 마치 산맥처럼 사선으로 힘차게 뻗어내린 모양으로 산 형상을 묘사한 봉(峰)자가 눈에 띈다. 전통의 맥락 위에서 파격을 서슴지 않는 작가의 기상과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KBS 드라마 ‘용의 눈물’의 타이틀 글씨로 유명한 이일구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형 수묵화를 내놨다. 이 밖에도 전각 분야에서 한 축을 형성한 임재우, 대전대에서 후학을 이끄는 전윤성, 해외 초대전을 20여 차례 열며 작품 활동의 반경을 국제무대로 넓히고 있는 정도준, 직접 한시를 쓰는 작가 선주선, 한국의사서화협회 명예회장 박영옥 작가의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김영기 한국서도협회 회장은 “원곡은 전통을 연마했으면서도 일찍이 실험 서예에 앞장서고,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해 ‘원곡체’라는 한글 서체를 만들어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한국 서예에 가까이 다가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성재 원곡문화재단 이사장은 “원곡상 수상자 전시회는 작가들에게도 매우 소중한 의미가 있지만 우리나라 서예발전에도 크게 기여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원곡상은 앞으로도 한국서예의 이론과 창작 발전을 위해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원곡문화재단은 제40회 원곡서예문화상 수상자로 강대희(한국서가협회 이사장), 제9회 원곡서예학술상 수상자로 이필숙(성균관대 유학대학원) 교수를 선정했으며, 14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시상식과 서예학술세미나를 연다. 전시는 19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