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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덩케르크 굴욕 그때, 처칠 '동네북' 영국을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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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㉔ 덩케르크 철수도 자긍심으로 바꾸는 영국

 올해 3월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비슷한 시기를 다룬 영화 2편이 나란히 작품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덩케르크(Dunkirk)’와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두 작품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국 이야기입니다. 마치 한 감독이 만든 것처럼 윈스턴 처칠의 총리 취임 전후가 배경입니다.

‘다키스트 아워’는 비주류 매파였던 처칠이 총리에 오르는 과정을, ‘덩케르크’는 처칠이 영국 전시 총리에 오른 후 결정한 첫 번째 작전을 다뤘죠. 두 작품은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승리가 아니라 패배의 순간을 다뤘다는 점입니다. 영화 제목처럼 '가장 암울한 시기'(Darkest hour)인 셈이죠.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중앙포토]

제2차 세계대전의 조연, 영국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vs 독일’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대표적인 전투라고 해도 1944년 6월 6일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떠올리죠.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 그리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 미군과 나치 독일군과의 치열한 공방전을 실감 나게 묘사한 명작들 덕분에 미군은 이 전쟁의 주인공이자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것처럼 묘사됐습니다.

하지만 미국 못지않게 군사적 희생을 치른 나라가 영국입니다. 영국군의 사상자(38만 3700명)는 미군의 사상자(40만 7300명) 규모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프랑스와 달리 개전부터 종전까지 주 전력이 나치 독일과 맞상대를 했고, 미국과 달리 본토도 많은 피해를 입었죠.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중앙포토]

그럼에도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고, 그 작전의 주역이 미국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방식은 미국과 다소 다릅니다.
승리의 환희보다는 고난에 대처하고, 절망의 순간에 굴하지 않는 용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올해 아카데미에 진출한 작품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인내와 불굴’,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방식 

‘덩케르크(Dunkirk)’는 독일군에 포위된 채 서부전선의 마지막 방어선 덩케르크에서 30만 명의 군인들이 철수하는 악전고투 과정을 그렸습니다.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는 강력한 나치 독일과 화친하자는 주장에 맞서 의회와 국민을 설득해내는 노 정치인의 뚝심을 다뤘습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 당시 전황 [사진=나무위키]

덩케르크 철수 작전 당시 전황 [사진=나무위키]

이보다 앞서 나온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더듬증이었던 국왕 조지 6세가 각고의 노력 끝에 공습으로 피폐해진 국민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담화문을 발표하며 국론을 하나로 묶어내죠.

왕(킹스 스피치)과 정치가(다키스트 아워), 그리고 군인과 민간인(덩케르크)을 통해 벼랑 끝에 내몰린 영국이 어떻게 버티고 살아남았는지 보여주는 이 세 작품은 비록 제각기 다른 감독이 만들었음에도 하나의 세트처럼 유기적으로 퍼즐을 맞춰가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운명적인 날을 맞아 저는 모든 가정에 직접 찾아가 대화하는 심정으로 국민 한 분 한 분에게 이 말을 전합니다. 고된 여정입니다. 앞길이 험난할 수도 있고 전쟁이 우리 마음속까지 잠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오직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의 결의를 신께 맹세합니다. 모두 하나 되어 그 맹세를 지킨다면 우리는 주께서 보호하사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의 담화)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한 장면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한 장면


“전쟁에서 철수는 승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덩케르크에서의 철수는 승리입니다. 우린 끝까지 싸울 겁니다. 해변, 들판, 거리 그리고 언덕에서도 우린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조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영화 ‘덩케르크’에서 윈스턴 처칠의 연설)

“수고했어(well done!)” 
“우리는 그저 목숨만 건졌을 뿐인데요. (All we did was survive)” 
“그거면 충분해. (That‘s enough)” 
(영화 ‘덩케르크’에서 시민들이 철수한 병사를 격려하는 장면)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한 장면. [중앙포토]

BOB(Battle of Britain), 버티고 버텨 역사를 바꾸다

대륙을 지배했던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연이어 침공에 실패하면서 영국은 정복이 불가능하다는 이미지가 강하죠.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근현대부터 만들어진 것이고, 고대부터 중세까지만 해도 유럽의 동네북에 가까운 신세였습니다.

로마 공화정 시절 카이사르의 정복 사업을 시작으로 6세기엔 앵글로·색슨족, 8세기엔 바이킹, 11세기 초엔 데인족(덴마크), 11세기 후반엔 노르만족 등이 차례로 정복하며 나라의 주인이 수시로 뒤바뀝니다. 지금과는 달리 '화려한' 연전연패가 영국사를 수놓고 있지요.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은 덴마크가 영국을 지배하던 시기가 배경이다. 연극 '햄릿'에 출연한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중앙포토]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은 덴마크가 영국을 지배하던 시기가 배경이다. 연극 '햄릿'에 출연한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중앙포토]

히틀러도 그런 역사를 떠올린 걸까요? 덩케르크 철수가 성공하자 독일은 영국 본토를 노립니다. 히틀러는 “우리에겐 나폴레옹에게 없었던 공군이 있다”며 자신만만했죠. 실제로 전쟁 후 상당 기간 영국은 독일 공군의 공습에 무기력하게 농락당하는데,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 나온 것처럼 전시 총리였던 처칠은 지하 방공호에서 내각을 꾸려야 했을 정도입니다. 말더듬이 조지 6세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총알 한 발 날아온 적 없는 미국 본토와 달리 영국은 당시 유럽 최강을 자랑한 독일 공군에 의해 쑥대밭이 됐습니다. 덕분에 브리스틀이나 포츠워스 같은 영국의 주요 항구 도시들을 가면 흔히 상상하는 빅토리아풍의 건물이 많이 남아있진 않습니다.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탓에 1960년대 이후 지은 네모반듯한 콘크리트 건물들로 대체된 탓이죠.

영국을 공습하기 위해 나선 독일 전투기 [사진=위키백과]

영국을 공습하기 위해 나선 독일 전투기 [사진=위키백과]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영국은 결사 항전으로 맞섰고, 이미 나라를 잃은 프랑스, 체코, 폴란드를 비롯해 13개국에서 파일럿들이 자원 입대해 힘을 보탰습니다.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 전쟁을 조기 마무리 지으려던 히틀러의 구상은 크게 흔들리게 됐습니다. 결국 독일은 1941년 5월 10일 소련을 기습 침공한 이른바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영국에서 물러납니다.

훗날 전쟁이 끝난 후 포로로 잡힌 독일 육군 원수 게르하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은 “전쟁의 패배를 결정한 전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노르망디 상륙이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아닌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이라고 답변했습니다.

독일 공군의 공습에 대비해 망을 보고 있는 영국 병사 [사진=위키백과]

독일 공군의 공습에 대비해 망을 보고 있는 영국 병사 [사진=위키백과]

통합의 서사와 분열의 서사

냉정히 돌아보면 영국은 제1ㆍ2차 세계대전에서 단 한 번도 상대를 압도한 적이 없습니다. 2차례 모두 힘센 친구(미국)의 힘을 빌려 버티는 데 성공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강자 덕분에 승리자의 한 켠에 선 그 과정조차, 영국은 후세에도 자부심을 갖고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서사로 재탄생시켰습니다.

매월 11월이 되면 영국인의 가슴엔 붉은 종이꽃이 붙습니다. 포피(poppy)라고 불리는 개양귀비꽃이지요. 제1ㆍ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입니다. 세계 최고의 리그라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 모여든 각국의 선수들도 예외 없이 유니폼에 붉은 종이꽃을 달고 운동장을 달립니다. 6ㆍ25나 8ㆍ15 때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죠.

2016년 11월 11일 영국 웹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년 월드컵 예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의 경기. 한 관중이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16년 11월 11일 영국 웹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년 월드컵 예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의 경기. 한 관중이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실은 대공습 때 영국도 불만과 혼란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노동자와 하층민이 사는 공업지대가 집중적으로 공습을 받았지만 상류층과 귀족이 거주하는 고급주택가는 공습이 덜했기에 민심은 좋지 않았습니다. 일부 런던 시민들은 호텔을 점거하기도 했고 왕궁 앞으로 몰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버킹엄 궁전이 폭격을 맞았을 때 처칠은 “이것을 알려야 국민을 단합시킬 수 있다”며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도를 허용합니다. 이후 결과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입니다. BOB에 대한 자부심은 당대부터 후세까지, 왕부터 일반 국민까지 다르지 않습니다.

2017년 10월 30일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가 관저 앞에서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하는 '포피'를 가슴에 달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 [연합뉴스]

2017년 10월 30일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가 관저 앞에서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하는 '포피'를 가슴에 달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 [연합뉴스]

"히틀러는 우리를 굴복시키지 못하면 전쟁에서 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이겨낸다면, 전 유럽은 해방될 것이며, 세상은 더 넓고 밝은 미래를 향해 전진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의무를 위해 일어서 견뎌 냅시다. 대영제국이 천년을 더 이어갔을 때,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들의 가장 위대한 시대(This Was Their Finest Hour)였다고…" (1940년 6월 18일 BOB 직전 윈스턴 처칠의 연설 中)

서로가 겪은 과정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영국과 한국의 상황을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6ㆍ25 추모식에도 참석하지 않는 대통령과 건국을 둘러싼 논란에 휩싸인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영국의 상황이 부럽기만 합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할 역사가 상대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청와대가 6월 25일 페이스북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의 러시아 국빈방문 중 찍은 'B컷'을 공개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수행단이 오리 동상을 구경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청와대가 6월 25일 페이스북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의 러시아 국빈방문 중 찍은 'B컷'을 공개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수행단이 오리 동상을 구경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건국 서사 완성에 실패했습니다. 건국 과정도, 신생국을 지킨 방어전에도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 됐죠. 진영마다 건국에 대한 의미도 다릅니다. 건국 시점도 1919년(진보)과 1948년(보수)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실은 같은 진영 안에서도 다릅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 건국 50주년을 홍보했던 민주당 정부가 이젠 별다른 설명도 없이 1919년 건국이 맞는다며 내년에 건국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998년 7월 16일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이 서울 세종로 종합청사에서 건국50주년 기념달리기 및 태극기 사랑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8년 7월 16일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이 서울 세종로 종합청사에서 건국50주년 기념달리기 및 태극기 사랑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왕조가 없는 민주공화국의 건국 서사는 일반 국민의 동참과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고구려나 신라처럼 천명을 부여받은 초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평범한 국민의 손으로 만들고 지켜냈다는 공통의 기억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사흘 뒤면 8·15 광복절입니다. 어떤 이에겐 일제에서 해방됐지만 민족의 분단이 고착된 날로, 어떤 이에겐 대한민국이 비로소 주권·영토·국민을 갖고 건국한 날로 다가오겠지요. 우리는 과연 언제쯤 모두가 공감하고 자부심을 갖는 건국 서사를 갖게 될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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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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