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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고립 풀고 평화를...고려 운명이 바뀐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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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⑲

1259년 6월 9일 고려 태자 왕전(王倎)은 몽골 제국의 동경(遼陽·만주의 요양)에 도착합니다. 뭉케 칸(원나라 헌종)을 만나 강화를 요청하러 가는 길입니다.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대몽항쟁을 펼친 지 약 3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고려는 몽골에 투항하지 않고 저항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몽골이 국왕 친조(親朝)를 요구하며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압박하자 고려 지도층은 본토를 내어주고 강화도로 천도하는 '벼랑끝 외교'로 버텼습니다.
당초엔 조금 버티면 될 줄 알았지만 시간은 고려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몽골은 금나라를 정복해 중국 하북을 차지하더니, 동유럽과 중동까지 진출하며 명실상부 천하의 패자(霸者)로 우뚝 섰습니다. 몽골과 화친하지 않으면 전 세계를 상대로 등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더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고려는 결국 고립-항전노선을 포기하고 몽골과의 강화 협상에 나서게 됩니다.

몽골 간섭기를 배경으로 고려왕과 몽골공주 출신의 왕비, 호위무사의 삼각관계를 다룬 영화 '쌍화점'

몽골 간섭기를 배경으로 고려왕과 몽골공주 출신의 왕비, 호위무사의 삼각관계를 다룬 영화 '쌍화점'

'벼랑끝 외교'의 종식

사실 고려는 더 버티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최씨 무신정권이 주도한 항쟁으로 자주성을 지킬 수 있었지만 대가는 컸습니다. 조정이 강화도로 피신해 있는 동안 내륙은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무방비로 내던졌습니다. 대부분의 국토가 황폐화됐고, 민심은 크게 이반됐습니다.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몽골도 태도를 바꿨습니다.
고종 43년(1256)부터는 국왕 대신 태자의 입조를 요구했습니다. 때마침 항전을 주도한 최씨 무신정권이 정변으로 무너지자(고종45년) 타협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듬해 태자의 입조가 결정됐습니다.
태자의 어깨에는 고려 왕조의 운명을 건 무거운 짐이 얹어진 셈이었죠.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축조한 강화도 광성보 [중앙포토]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축조한 강화도 광성보 [중앙포토]

그런데 바로 이때 역사의 나침반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중국에 도착한 태자 일행은 공교롭게도 남송(南宋)을 공략 중이던 뭉케 칸이 사망했다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이와 동시에 몽골의 정세는 매우 급박하게 흘러갔습니다.
몽골 황실이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阿里不哥)의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계승 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왕이) 육반산에 도착하니 헌종(憲宗) 황제는 붕어했고, 아릭 부케(阿里不哥)는 군대를 북방에 배치하고 있어, 제후들은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당시 황제(皇弟·황제의 동생) 쿠빌라이(忽必烈)는 강남에서 군대의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넷플릭스가 지난해 12월 공개한 드라마 ‘마르코 폴로’에서 쿠빌라이 칸(베네딕트 웡) [사진제공=넷플릭스]

넷플릭스가 지난해 12월 공개한 드라마 ‘마르코 폴로’에서 쿠빌라이 칸(베네딕트 웡) [사진제공=넷플릭스]

왕전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릭 부케가 있는 북쪽으로 가야할 지, 쿠빌라이가 있는 남쪽으로 가야할 지 고민은 깊어갔습니다. 몽골의 핵심층조차 추이를 지켜보며 머뭇거릴 정도였으니까요. 이같은 안개정국에서는 고려로 귀환하는 것을 선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몽골의 계승 분쟁이 마무리된 뒤 다시 찾아오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었겠죠.
그런데 왕전은 이 순간이 승부처라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과감하게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왕전의 이 발걸음이 고려의 운명을 바꿔놓게 됩니다.

쿠빌라이를 선택한 도박, 성공적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모두 뭉케 칸의 친동생이었지만 수도 카라코룸을 점령하고 있던 아릭 부케가 다소 우세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쿠빌라이는 뭉케 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랜 기간 한직을 전전한데다, 유력한 후원 세력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왕전 일행은 왜 쿠빌라이 쪽을 택했을까요. 내막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서의 기록과 왕전의 행적을 통해 추정을 해볼 수는 있습니다.
태자 일행은 뭉케 칸의 부고를 접하고도 귀국하지 않고 2~3개월간 섬서성 일대에서 체류했습니다. 아마도 몽골의 정세를 가늠할만한 고급 정보를 얻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 것 같습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짧지만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왕전은) 천명과 민심의 거취를 능히 깨달아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갔다.” (『고려사절요』 원종 1년 3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절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절요』

'뜻밖의 선물'을 받은 쿠빌라이는 기쁨을 감추지 않습니다.

“고려는 만리 밖에 있는 나라로서 당 태종이 친정을 했어도 복속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세자가 내게 찾아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고려사절요』 원종 1년 3월)

당대 몽골 지배층에게 고려는 '저항'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당 태종조차도 정복을 포기했던 곳이라는 인식이 널리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고려가 스스로 찾아와 복종 의사를 밝혔으니 쿠빌라이로서는 자신의 정통성과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그리고 황위 계승 싸움에서 쿠빌라이가 최종 승리하면서 고려는 승리자의 한 켠에 설 수 있게 됐습니다. 왕전의 남행(南行)은 독일 정치가 비스마르크의 말처럼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가는 순간,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간” 결단이 됐습니다.

마르코 폴로 가족이 1275년에 쿠빌라이 칸을 만나는 모습, 15세기 프랑스 작품. 마르코 폴로(맨 왼쪽 어린이)와 그의 아버지, 삼촌이 쿠빌라이 칸에게 문서를 전달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 가족이 1275년에 쿠빌라이 칸을 만나는 모습, 15세기 프랑스 작품. 마르코 폴로(맨 왼쪽 어린이)와 그의 아버지, 삼촌이 쿠빌라이 칸에게 문서를 전달하고 있다.

황제에 즉위한 쿠빌라이는 고려가 내건 여섯 가지 조항을 파격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의관은 본국지속(本國之俗)에 따를 것이며 상하가 모두 개역(改易)지 아니할 것
②행인(行人)은 조정에서 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신은 일체 금절할 것
③출륙환도의 지속은 역량에 맞추어 진행할 것
④압록강 유역에 주둔하는 몽골 병사는 가을 내로 철수할 것
⑤다루가치(達魯花赤·몽골이 파견한 관리) 일행은 서환(西還)토록 할 것
⑥몽골 측에 사신으로 온 10여명에 대해서는 그 소재를 철저히 조사할 것

이 조항들이 담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④⑤는 고려의 내정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내용입니다.

③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출륙환도는 조정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몽골은 오래전부터 개경 환도를 촉구해왔지만 고려는 이를 거부하며 항전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이는 고려-몽골 사이의 최대 쟁점사항이었는데 고려 측에 최대한 재량권을 준 것입니다.

몽골은 강력한 기병을 기반으로 급속도로 국토를 확장시키고 세계 제국으로 거듭났다.

몽골은 강력한 기병을 기반으로 급속도로 국토를 확장시키고 세계 제국으로 거듭났다.

②는 칭기즈칸 일족인 주변 번왕들이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 못하도록 배려한 조항입니다.

학자들에게 오랫동안 주목을 끈 것은 ①인데, 본국의 관습을 유지한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입니다. 훗날 몽골이 고려의 독립성을 침해하려는 시도를 벌일 때마다, 방어 명분으로써 큰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여섯 가지 항목들을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양보를 얻어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같이 고려가 외교적 성과를 얻은 것은 아릭 부케와의 전쟁을 앞두고 긴박한 처지에 있던 쿠빌라이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 주효했습니다. 또한 오랜 항전으로 국력과 왕권이 약화된 고려 왕실로서도 최상의 타협책이었습니다.

고려 삼별초군이 최후의 항전 근거지로 쌓은 제주도 항파두리성 유적 [중앙포토]

고려 삼별초군이 최후의 항전 근거지로 쌓은 제주도 항파두리성 유적 [중앙포토]

양측의 만남이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왕전은 왕위에 오른 뒤 기존의 고립 노선을 선호하는 무신 세력에 의해 폐위됐다가 몽골의 도움으로 간신히 복위하는가 하면, 몽골은 고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한때 정벌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 돌려진 물줄기는 꺾이지 않았고 양국은 이후 100년 가까이 긴밀한 관계를 이어갑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고려의 대몽항쟁 포기는 굴욕일까

고려는 몽골에 복속하면서 적지 않은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됐습니다. 몽골은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고려에 파견해 내정에 개입하려 했고, 이 기간 고려의 왕들은 충성을 의미하는 '충(忠)'자를 돌림자로 쓰게 됐습니다.
이때문에 몽골간섭기를 자주성의 상실과 굴욕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부 등 군사정권 시기엔 무신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대몽항쟁과 삼별초의 저항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시기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고려가 몽골의 속국으로 전락하여 일방적인 간섭과 수탈만을 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익히 알려져 있듯이 고려 국왕은 대대로 몽골 황실과 혼인을 맺으며 부마에 봉해지고, 몽골 칸의 계승 분쟁에도 깊숙하게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몽골이 구축한 세계 질서 안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지위를 누린 것이죠.

MBC 드라마 '기황후'는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의 일대기를 다뤘다. 그의 아들 빌레그트 칸(必里克圖汗)은 원나라 12대 황제에 올랐다. [자료제공=MBC]

MBC 드라마 '기황후'는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의 일대기를 다뤘다. 그의 아들 빌레그트 칸(必里克圖汗)은 원나라 12대 황제에 올랐다. [자료제공=MBC]

독자적인 제사와 관제를 온전한 유지한 것도 그렇습니다. 훗날 카이샤 칸(원 무종)은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을 보유하고 왕위를 누리는 것은 오직 삼한(三韓·고려)뿐이다”(『고려사』 충선왕 2년 7월)라고도 말했습니다.
몽골 황실의 사위로서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 고려 왕들은 정치·경제 개혁에 박차를 가하며 일정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려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몽골이 구축한 세계 경제망에 편입돼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수혜를 입었습니다.
몽골이 발행한 지폐 '교초'는 이슬람부터 고려까지 사용되며 오늘날 '달러' 같은 구실을 했습니다. 덕분에 이슬람과의 교역이 더욱 활성화됐는데, 이슬람 남성인 '회회(回回) 아비'가 개성 거리에서 유혹한다는 내용의 고려가요 ‘쌍화점’도 충렬왕 때 나온 작품입니다.
조선보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데도 유목민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몽골의 영향이 일조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주류인 소주는 몽골간섭기가 남긴 유산이다. 몽골은 이슬람의 증류주 제조 방식을 도입해 소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마 '무한동력'의 한 장면. 네이버 TV캐스트 '무한동력'의 한 장면

한국을 대표하는 주류인 소주는 몽골간섭기가 남긴 유산이다. 몽골은 이슬람의 증류주 제조 방식을 도입해 소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마 '무한동력'의 한 장면. 네이버 TV캐스트 '무한동력'의 한 장면

원나라의 수도는 당대 세계의 지식이 모여든 장소였습니다. 고려의 신진 학자들은 성리학을 배우며 훗날 조선 건국에 기여했고, 관료로 등용된 색목인(色目人)들과 교류하며 유럽보다 앞선 이슬람의 과학·수학·지리 등의 문물을 습득했습니다.
지금도 후세인들을 감탄시키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바로 이때 섭취한 지리적 지식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는 중국 중심으로 그려진 기존 지도와 달리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기록돼 매우 높은 정확도를 자랑합니다.

조선 초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아라비아와 아프리카까지 담겨져 있다. 몽골을 통해 흡수한 이슬람 문명의 지리학 지식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조선 초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아라비아와 아프리카까지 담겨져 있다. 몽골을 통해 흡수한 이슬람 문명의 지리학 지식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가장 큰 수확은 극한 고립 투쟁으로 30여년간 피폐해진 민생이 다시 안정을 찾게 된 점이었습니다. 고려는 ‘팍스 몽골리카나’에 기대어 이후 1세기 동안 내란이나 외침 없이 비교적 평안한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단군신화를 기록한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조차도 고려 태자 왕전과 쿠빌라이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원종(왕전)이 신기(神技)를 찾았도다…청사는 태평을 구가하고 백성들은 즐거움을 노래할 뿐이다.”

고려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세운 몽골과의 관계를 통해 세계 경제망에 편입됐다.

고려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세운 몽골과의 관계를 통해 세계 경제망에 편입됐다.

북한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기회 

롤러코스터를 타던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대로 6월 12일에 열리게 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체제를 지키면서 한국 수준으로 번영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했고, “김정은은 안전할 것이고 그의 나라는 부유해질 것”이라고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토록 북미회담에 공을 들이는 데 대해 올해 말 열리는 중간선거를 위한 ‘한 방’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불거진 성인비디오 배우와의 스캔들을 비롯한 각종 잡음으로 정치적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오른 상태입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소식을 알리는 해외 언론 [중앙포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소식을 알리는 해외 언론 [중앙포토]

김정은 국방위원장도 더 이상의 경제 제재는 정권 유지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고립주의를 고수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외교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외교는 타이밍”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흰 봉투에 들어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댄 스카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국장 트위터 캡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흰 봉투에 들어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댄 스카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국장 트위터 캡처]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달 31일 “세계의 흐름을 바꿀 일생에 한 번뿐인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으려면 김정은 위원장의 과감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남쪽으로 향했던 800년 전 고려 태자의 발걸음처럼 역사의 분기점에서 북한이 큰 발걸음을 내딛기를 기원해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호동 『몽골제국과 고려』, 고명수 『몽골의 ‘복속’인식과 蒙麗관계』, 윤은숙 『쿠빌라이와 고려』, 이강한 『'친원'과 '반원'을 넘어서
- 13~14세기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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