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농업은 생명산업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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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WTO가 농민을 죽였다!" 고(故) 이경해씨가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하기 전 외친 한 마디다.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다자간 기구로 모든 회원국의 국민에게 부의 증진.번영.복지개선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농민들은 왜 지금 WTO를 반대하고 농업 협상을 중단하라고 외치고 있는가.

한국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결과에 따라 농축산물을 전면 수입개방했다. 유일하게 쌀만 최소시장접근물량 방식으로 2004년까지 10년 동안 국내 소비량의 4%까지 수입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나라는 농축산물을 개방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어이없는 일이다.

WTO 출범 이후 농축산물의 수입액은 2000년까지 51.2%가 늘었다. 세계 평균인 32%를 훨씬 웃도는 수치다. UR협정 이행에 따라 쌀 수매 등 정부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고 농업생산에 지원되는 정부예산마저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UR협상 결과와 WTO 출범으로 농민들이 삶의 희망을 잃고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법적이든 밀수이든 물밀 듯이 들어오는 외국 농축산물에 의해 국내 농축산물은 가격폭락을 면할 수 없다. 수요와 공급의 냉정한 원리다. 팔아도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는가 하면 아예 팔지 못해 땅을 갈아엎을 수밖에 없기도 한다.

도시가구 소득에 대비한 농가 소득의 비율은 1994년 99%에서 2000년에는 80%, 2001년에는 75.9%으로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 통계로 파악한 농가부채만 해도 약 2백59%가 증가했다. 아무리 빚농사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빚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빚은 농민들을 농촌으로부터 떠나게 만든다. 빚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은 동네사람들의 눈을 피해 봇짐을 싸 어디론가 떠난다. 요즘 도시민이 카드 문제로 자살하고 있듯이 농민들 또한 빚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지난해 한해만 해도 35만명이 농촌을 떠났고 올해 초 3명의 농민이 자살했다. 계속된 비와 태풍 '매미'로 올 농사마저 망쳐버린 농민들은 연말 부채상환을 앞두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WTO가 강요하는 농업의 상품화, 시장자유화는 한국과 같은 개도국의 농업 부문을 파탄시키고 있다. 멕시코 칸쿤에 모인 농민들의 외침은 오직 한 가지다. "WTO 협상에서 농업을 제외하라!"

농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생명이요, 어머니다. 각국의 식량주권 인정, 중소농 보호, 유전자변형식품 반대 등을 주장하는 농민들의 외침은 이제 세계 모든 사람의 외침이 됐다.

농업은 국민에게 안전하게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을 떠맡고 있어 생명산업이라 하고, 경제발전의 뿌리이기에 기간산업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부 관료와 일부 언론은 경제발전의 한 축인 농업의 기능과 역할을 무시한 채 공산품 수출을 위해 농업은 희생돼야 한다는 식으로 국민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무역을 통해 국민소득을 높이고, 경제를 살리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농업과 농촌을 파괴하고 국민에게 안전하게 식량을 공급해야 할 역할마저 포기하고 다국적 기업에 우리의 생명을 맡겨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농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 농업.농민 지원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동시에 국민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농업 지원의 당위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것이 농민은 물론 국민 모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박흥식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