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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승희의 시시각각

진영은 답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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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승희
박승희 기자 중앙일보 중앙선데이 국장
박승희 중앙SUNDAY 국장

박승희 중앙SUNDAY 국장

한 사람은 구속기한 만료로 석방됐다. 562일 만이다. 블랙리스트 지시 혐의로 2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니 완전한 석방은 아니다. 그럼에도 몰려든 군중은 그가 탄 차의 유리까지 깨뜨리며 분노했다. 그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내 편만 옳다는 식의 괴물 정치가 분노 키워 #진영 싸움 고비마다 승패 가른 건 통합·협치

또 한 사람은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소환됐다. 참고인도 아니고 피의자 신분이었다. ‘드루킹’ 여론 조작 사건에 공모한 혐의다. 포토라인에 선 그에겐 장미꽃들이 던져졌다. 그는 김경수 현 경남지사다.

극과 극의 장면이다. 무서운 분노의 정치가 또 하나의 땔감을 쌓았다. 내 편이면 무조건 옳고, 내 편이 아니면 옳지 않다는 진영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이렇게 자꾸 땔감들을 쟁여놓고 있다.

개혁진영 20년 집권론은 그래서 나왔을 게다. 민주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 출마한 이해찬 후보는 “개혁 정책이 뿌리내리려면 20년 정도는 집권하는 계획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10년을 집권했어도 정책이 뿌리를 못 내리고 불과 2, 3년 만에 뽑히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런 만큼 경험은 소신이 됐을지 모른다. 문제는 20년 집권론이 해답이냐다. 진영정치의 주 동력은 선(善)·악(惡)의 이분법이다. 늘 옳고, 정의인 내 편이 오래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도 그렇게 도출됐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교훈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선악은 5년마다 바뀌었다. 같은 진영 출신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이 다르면 또다시 선악이 분화하는 ‘소진영 정치’까지 경험했다.

10년 전 얘기다. 2008년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정부 조직개편안을 발표했다. 기획재정부·인재과학부·지식경제부 등 생소한 이름의 부처들이 들어 있었다. 건국 이래 처음 정부 부처 이름에서 ‘교육’이 사라졌다는 게 당시 신문 기사 제목이었다. 인수위 측은 교육부 대신 인재과학부로 명칭을 바꾼 데 대해 “교육이란 단어는 공급자 관점에 서 있다는 느낌을 줘 뺐다. 이름이 달라지면 교육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삼청동 식당에서 만난 발표자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자신들을 선한 개혁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인수위 발표 뒤 논란 끝에 인재과학부는 교육과학기술부가 됐고 이 나라의 교육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필름을 차분하게 돌려 보자. 선거로 뽑힌 5년 임기 대통령 중 ‘개혁’을 약속하지 않은 정부가 있었는가. 기간의 장단 차이는 있지만 취임 초 60%, 70% 지지율을 기록하지 않았던 대통령이 있었는가.

김대중·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이명박·박근혜에서 문재인으로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 승패를 좌우한 건 진영이 아니었다. 진영에만 몰두하는 대통령과 여당을 심판한 건 비진영의 표들이었다. 우리 정치에서 냉정한 판단을 내린 건 늘 중도였다. ‘노사모’의 열광이 식자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도, ‘박사모’의 광기에 질려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도 비진영 표들이 쏠린 결과였다. 진영은 필요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그래서 진영에 기반한 20년 집권론은 정답이 아니다.

진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진영으로 갈린 분노의 정치가 차곡차곡 땔감을 쌓는 걸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누가 더 그들에게 필요한지를. 그래서 진영을 앞세운 20년 집권론은 허구다. 때가 되면 언제나 한국 정치의 답은 통합이었고, 협치였다. 진영 논리가 극성을 부릴수록 답은 더 자명해졌다.

박승희 중앙SUNDAY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