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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급 타왔더니 너무 적다며 발길질한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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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더,오래] 인생환승샷(45) 노점상 주인에서 전업작가로, 김명희

인생에서 누구나 한번은 환승해야 할 때와 마주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직장이나 일터에서 퇴직해야 하죠. 나이와 상관없이 젊어서도 새로운 일,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한번 실패한 뒤 다시 환승역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 인생 환승을 통해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생한 경험을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

2018년 1학기 동안 진행한 서울 남산도서관 예비작가교실 강의 사진이다. [사진 김명희]

2018년 1학기 동안 진행한 서울 남산도서관 예비작가교실 강의 사진이다. [사진 김명희]

나는 폐결핵, 고혈압, 당뇨, 해소천식, 백내장… 합병증을 앓던 아버지와 함께 30년을 보냈다. 전염병자의 딸이었기에 내 평생 절친한 친구도 없다. 가장으로 돈벌이를 나선 엄마 대신 병든 아버지를 위해 아홉 살 때부터 엄마 대신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했다. 어린 나이에 이유 없는 매를 맞고 발에 짓밟혀도 말려줄 사람조차 없었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극도의 공포는 나를 자폐증 환자로 만들어버렸고, 아버지 곁에서 오랜 병간호를 하면서 나도 병이 옮아 폐결핵 환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아홉 살부터 엄마 대신 살림과 김장을 도맡아 하며 아버지의 모든 병간호를 했다. 아버지의 오랜 병으로 내 위 언니와 오빠들은 객지로 나가 점차 연락을 끊었고 나는 결국 고등학교를 입학해 단 두 달 만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다음날부터 아버지 약값을 벌기 위해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그렇게 대책 없이 뛰어든 인생벌판은 참으로 혹독했다. 군복공장 미싱사 보조로 첫 월급을 탔지만, 몸이 병들고 마음마저 폭군이 된 아버지는 내가 학교 중퇴하고 공장에서 받아온 첫 월급으로 밤새 내 뺨을 때리고 발로 걷어차며 온갖 욕을 다 퍼부으셨다. 이유는 돈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잘못 했는지도 모른 채 밤새 ‘잘못했다’고 빌며 맞고 걷어차이기를 반복했다. 그 후 엄마마저 과로로 지쳐 병들어갔고 나는 더 나은 돈벌이를 찾아야 했다.

군복공장에서 바바리공장, 가죽 잠바공장, 아동복공장, 홈패션 공장, 그리고 더 나아가 칫솔장사, 빵 장사, 붕어빵 장사, 어묵·떡볶이 장사로 시장 구석에 난전을 펼쳤다. 그렇게 벌어도, 매 순간 응급실로 중환자실로 전전하는 아버지의 약값과 병원비는 턱도 없었다.

도서관에서 문학강의를 마치고. [사진 김명희]

도서관에서 문학강의를 마치고. [사진 김명희]

나는 고심 끝에 폐차장에서 가장 고물로 나온 화물차 한 대를 어렵게 구했다. 에어컨도 없고 파워핸들도 안 되는 차였다. 다음날 바로 그 트럭에 과일을 싣고 시장이 먼 산간벽지와 공장을 찾아다니며 스피커로 방송을 틀고 떠돌이 행상을 시작했다. 나는 매일 20~30kg씩 되는 사과나 포도 같은 과일 상자를 정신없이 배달하며 뛰었다. 그 당시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빌라나 고층 건물 계단을 상자 서너 개씩 품에 안고 단번에 계단을 오르내렸다.

여자 몸으로 혼자 산동네를 다니며 젊고 늙은 남자들로부터 받는 성희롱과 막노동처럼 일이 고된 화물노점상은 다 견딜 수 있었지만 화장실이 항상 문제였다. 마당에 있는 화장실들도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남자 같으면 적당히 처리하면 될 일이지만, 여자는 소변을 누고 생리대를 갈아야 하는데 해결할 곳이 없었다. 화장실이 급할 때마다 장사하다 말고 다급히 숲속으로 달려가 나무 뒤에 숨어 대명천지 하늘 아래에서 생리대를 갈고 소변을 해결하며 장사했다.

그렇게 시작한 내 인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30년 동안 열여섯 가지 직업을 떠돌았고 무수히 차에 치여 과일을 실은 트럭과 함께 논바닥으로 날아가 처박히기를 여러 번. 주말은 고사하고, 나는 항상 아버지가 실려 가신 응급실 아니면 중환자실에서 새해와 명절을 맞았고 성탄절을 보냈다. 아버지 생명이 연장될수록 나의 몸과 관절은 급속도로 망가져 갔다. 그러는 동안 언제까지 내가 고된 노점상을 하며 삶을 해결하겠는가 생각했다.

그때부터 낮엔 차 끌고 장사를 다니고 밤늦도록 검정고시 공부를 했고,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경매장으로 나가 과일을 싣고 장사를 나갔다. 이렇게 견디기를 십여 년,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그 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해 국문학 공부를 병행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마다 차 끌고 장사하다 학교로 달려가 시험을 치고 다시 근처 동네나 창녀촌으로 들어가 남은 과일을 팔았다.

그러면서 일찍부터 느낀 삶의 애환과 고난을 소재로 오랫동안 시를 썼던 작품들로 2006년에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해 시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암울했던 삶은 밝은 곳으로 서서히 환승을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고등부 문학수업 시간에. [사진 김명희]

도서관에서 고등부 문학수업 시간에. [사진 김명희]

2년 후 아버지는 72세로 저세상으로 떠나셨고 그 후부터 나는 그동안 쓰고 싶었던 시와 소설 창작에 집중했다. 유년시절 슬픈 화전민으로 살았던 경험을 살려 산림청주최 공모전에 숲을 소재로 한 동화로 대상을 받았고, 생에 첫 장편 소설을 써서 제2회 직지소설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끝이 보이지 않아 힘겨웠던 시절 이를 악물고 주경야독으로 준비한 국문과 전공 공부가 도움되어 학원논술 강사로 취직했다.

행복이 무엇인지 난생처음 느낀 것이 마흔을 코앞에 둔 시기였다. 지금은 오랫동안 내가 몸담았던 공장과 지긋지긋한 노점장사의 생을 마감하고 나는 작가로서 시인으로서 학원과 도서관으로 문학강의를 나가고 있다.

지금 내 나이 쉰하나다. 내 인생 절반이 넘는 30여년이 아버지의 병간호로 지나갔지만 지금은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밑천 삼아 전업 작가로서 열심히 활동 중이다. 가끔 만나는 시인과 소설가 동료들은 글을 쓸 소재가 없다고 푸념한다. 나는 평생 겪어온 인생의 고비가 너무 많아 스토리 소재들이 차고 넘친다. 죽을 만큼 힘겨웠던 그때는 몰랐다. 그 시절 겪은 모진 눈물과 한숨과 절망이 지금은 나를 먹여 살리는 소중한 자산이다.

절경은 시가 될 수 없고, 고생 하나 없이 살아온 단조로운 삶은 누구의 귀감도 되지 못한다. 작가는 가장 밑바닥에 사는 힘겨운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을 따뜻하게 위로할 책무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오랜 시간 단단하게 연단시켜준 나의 창백하고 암울했던 지난날들에 감사하고 감사하다.

앞으로 남은 꿈이 있다면 대한민국 작가로서 전 세계가 놀랄 대작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내 나라로 반드시 가져오는 것이다. 이제 나의 또 다른 인생환승을 위해 멋지게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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