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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이 넘었을 내 첫사랑,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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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더,오래] 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25·끝)

북을 떠올리면 항상 생각나는 잊지 못할 오빠. [중앙포토]

북을 떠올리면 항상 생각나는 잊지 못할 오빠. [중앙포토]

남과 북의 두 지도자가 만나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한다. 굳게 잠겨있던 마음의 자물쇠가 풀려 막혔던 길이 뚫릴 듯한 분위기다. 나의 첫사랑 오빠도 만날 수 있을까?

90이 넘은 나이지만 그 오빠를 생각하면 내 마음은 20대로 돌아간다. 추억은 늙지 않고 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 세월에 빛바랜 옛사랑이 되었다. 이젠 늙어서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겠지? 북을 떠올리면 항상 생각나는 잊지 못할 오빠.

의과대학 1학년 때 경부선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나  

오빠와의 첫 만남은 경부선 기차 안이었다. 나는 의과대학 1학년 겨울방학을 맞아 부산 집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그 시절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1박 2일이 걸렸다. 기차에서 하룻밤을 자야 했다. 기차표 사기도 힘들어 쉽게 탈 수도 없었고 좌석 표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사람이 많아 기차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기도 쉽지 않았다. 틈을 찾아 겨우 자리를 펴고 앉아 한숨 돌리는데 누군가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창을 열자 남학생 한명이 고개를 들이밀며 들어왔다. 사람들이 학생이라며 안으로 끌어당겼다.

교복을 입고 있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당겨도 당겨도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키가 너무 커서 기린 한 마리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몇 사람이 힘을 합쳐 겨우 들어온 학생은 그 비좁은 바닥의 빈 곳을 찾아 앉더니 연신 고맙다고 절을 했다. 이젠 부산에 갈 수 있다며 좋아했다. 그곳이 바로 내 옆자리였다.

기차 옆자리가 인연이 돼 우리는 오누이같이 지냈다. [중앙포토]

기차 옆자리가 인연이 돼 우리는 오누이같이 지냈다. [중앙포토]

그것이 인연이 돼 우리는 오누이같이 지냈다. 나는 서울 여자의과대학(고려대 의예과 전신) 1학년이고 오빠는 서울대 의예과 2학년이었다. 우리는 자란 환경부터 달랐다.

나는 유복한 집 딸이었다. 우리 집은 수영 앞바다를 나라에서 허가받아 소유했고 그 근처에 논밭도 많았다. 그 수영 바다와 주변의 우리 집 논밭을 관리해주는 집의 둘째 아들이 오빠였다.

그 집의 주인을 우리는 수영 아버지라 불렀다. 수영 아버지는 인품이 준수하며 자식들 교육열이 강했다. 큰아들은 일본에 유학시켰는데, 그 시절 최고 명문인 동경 제일고(동경대 예과 전신)를 나와 동경제국대학을 다니는 수재였다.

그 당시 동경 제일고를 나와 동경제대에 다닌 학생은 부산에서 우리 종갓집 오빠와 그 집 큰아들 둘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은행 총재를 아버지로 둔 종갓집 오빠는 일본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다며 만주로 일본으로 뛰어다녔다.

우리는 독일어를 공부하고 전공 공부도 함께하며 서로에게 힘이 돼 주었다. [사진 pixabay]

우리는 독일어를 공부하고 전공 공부도 함께하며 서로에게 힘이 돼 주었다. [사진 pixabay]

내가 가끔 큰댁에 가면 큰어머니는 오빠가 돈과 물건을 가지고 가 오지 않는다며 속상해하면서도 오빠 걱정을 쏟아 내곤 했다.

그 오빠는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됐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는 북에 남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곳의 검찰청 간부가 됐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내 첫사랑 오빠는 큰 형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공산주의에 관한 책이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형이 학생 시절에 읽었던 책 중 집에 있는 것이라며 『학생과 생활』, 『학생과 철학』, 『골짜기에 핀 백합』, 괴테의 시집 등을 읽어보라고 줬다. 이념이나 사상 책은 한권도 주지 않았다.

우리는 1년여를 붙어 다녔다. 독일어를 공부하고 전공 공부도 함께하며 서로에게 힘이 돼 주었다. 우리 집에서는 전공도 같고 차남이라 데릴사위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에 오누이처럼 지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보다 형을 더 사랑한다"며 북으로 간 오빠 

형을 우상처럼 존경한 오빠는 모스크바대학에 가고 싶다며 비밀리에 형이 있는 북으로 갔다. [사진 pixabay]

형을 우상처럼 존경한 오빠는 모스크바대학에 가고 싶다며 비밀리에 형이 있는 북으로 갔다. [사진 pixabay]

그때는 해방 직후로 아직 남과 북이 이념대결로 적대시하기 전이었다. 38선도 자유롭게 넘나들던 과도기였다. 형을 우상처럼 존경한 오빠는 모스크바대학에 가고 싶다며 비밀리에 형이 있는 북으로 갔다. 형님이 오란다고 했다.

그가 떠나기 전 “너는 그곳에서 살 수 없어. 너는 부르주아(bourgeois) 출신이라 갈 수 없는 곳이야. 너를 사랑하지만, 형을 더 존경하며 사랑한다”고 내게 말했다. 오빠는 월북 후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북에서의 자기 이름은 김동일이라고 알려주며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연락을 준 것이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 후 6.25가 터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다렸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오빠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인민군에 섞여 소백산 산속을 헤매기도 했다.

그때 오빠가 일본 신문에 광고를 내 나를 찾았다는 소식을 먼 훗날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웃 사람이 내가 죽었다고 우리 집에 거짓으로 알리는 바람에 모두가 그리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후로 나를 찾지 않은 것을 보면 오빠도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지 않았을까.

6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이렇게 남북관계가 부드러워져 평화 분위기가 감도니 오빠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보고 싶다. 긴 세월에 변한 우리 모습을 생각하니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어린 시절의 그리운 모습으로 남아 아름다운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어떤 식이로든 남과 북에 평화가 오고 왕래가 가능해져서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heesunp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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