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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등산사] 미국·러시아, 에베레스트서 보여준 '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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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23일. 에베레스트는 아수라장이었다.

■ 2001년 5월 23일 에베레스트 #날씨 계속 나쁘고 6월 몬순에 쫓겨 #등반가 몰려 하루 등정 40명 넘어 #보드 활강 기록한 날 곳곳서 사투 #오만·과욕·오판…사고로 이어져 #미국팀, 러시아팀 구조에 큰 도움 #

프랑스의 마르코 시프레디가 에베레스트에서 첫 스노보드 활강에 성공한 날이었다. 프레디는 정상에서 3시간도 안 걸려 전진베이스캠프(ABC)에 도착했지만 몇 사람은 3일간 ‘죽음의 지대(8000m 이상)’에서, 말 그대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에베레스트 전경. 4000명 넘는 등반가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등반 중에 사망했다. 중앙포토

에베레스트 전경. 4000명 넘는 등반가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등반 중에 사망했다. 중앙포토

미국-마지막과 처음이라는 욕심이 있었다

5월 23일, 미국인 가이드 앤디 랩커스의 산소통이 말썽을 부렸다. 앤디는 점점 뒤로 처졌다. 같은 상업원정대의 다른 팀들이 정상을 찍고 8700m 지점에 내려섰을 때, 앤디는 그의 팀원(고객)인 제이미 비냘과 함께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가이드인 아스무스 노레슬레트와 함께였다. 시계는 12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과 산소가 부족해.”
정상에서 내려오던 동료 가이드 크리스 워렌이 만류했다. 하지만 그들은 등정을 택했다.  앤디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고 싶었다.

2001년 5월 23일 에베레스트에서 스노보드 하강을 하고 있는 마르코 시프레디.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공했다. [중앙포토]

2001년 5월 23일 에베레스트에서 스노보드 하강을 하고 있는 마르코 시프레디.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공했다. [중앙포토]

과테말라 출신인 제이미는, 이 에베레스트만 오르면 중남미 출신의 세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된다. 그리고 중앙아메리카 첫 7대륙 최고봉 등정자가 된다. 이미 두 차례 도전에서 물러난 상태였기에 절박했다. 이번에도 3만5000달러의 돈을 들여 6명의 가이드와 함께 오르는 10명의 팀원에 속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헛된 영광일 뿐이다. 살아서 내려가야 했다.

8700m에서 8848m 정상까지 1시간30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들은 3시간을 들여야 했다. 오후 2시30분이 돼서야 정상에 올랐다. 다시 8700m 지점으로 되돌아 올 때는 오후 5시가 됐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망원경으로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이미는 계속 주저앉았고 앤디는 그를 계속 일으켜 세웠다. 아스머스는 보관해둔 산소통을 챙겼다. 제이미에 이어 앤디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8750m의 에베레스트 ‘서드 스텝’에서 앤디와 제이미·아스머스는 비박(bivouac·노숙)에 들어갔다.

베이스캠프에서는 과테말라에 있는 제이미의 아내에게 위성전화를 걸었다. 아내의 첫 반응은 이랬다.
“아, 비박이요. 별을 보면서 자는 거 말이죠. 우리 그이는 그걸 참 좋아하죠.”
얼마 뒤 상황 파악을 한 제이미의 아내는 울부짖었다.

과테말라의 제이미 비냘. 그는 2001년 5월 23일 에베레스트에 올라 중앙아메리카 첫 7대륙 최고봉 완등자가 되면서 부와 명성을 얻게 됐다. [중앙포토]

과테말라의 제이미 비냘. 그는 2001년 5월 23일 에베레스트에 올라 중앙아메리카 첫 7대륙 최고봉 완등자가 되면서 부와 명성을 얻게 됐다. [중앙포토]

미국 구조대가 8300m 캠프에서 이들을 구하러 나섰다. 이 미국 팀은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빙의 1924년 에베레스트 초등 여부를 밝히기 위해 온 원정대였다. 이들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포기하고 3명의 미국인과 2명의 네팔인으로 구조대를 꾸렸다.

오후 11시30분, 아스머스가 홀로 최종 캠프에 도착했다. 앤디와 제이미는 아직 위에 있었다. 5월24일 새벽, 미국 구조대는 앤디와 제이미를 발견했다. 앤디는 무전기 배터리 교체를 위해 장갑을 벗었다가 한순간에 손가락이 얼어버렸다. 두 명 모두 뇌부종에 걸렸다.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갑자기, 노란 옷의 산악인이 추락했다. 이 장면이 베이스캠프의 망원경에 잡혔다. 그는 얼음지대를 가로질러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여러 차례 바위와 부딪히며 북벽 아래로 떨어졌다. 누굴까. 앤디일까, 제이미일까. 베이스캠프는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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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몸 상태 나빠도 등정을 고집했다 

‘2001 시베리안 원정대’의 알렉세이 니키포로프는 지쳐 있었다.
"괜찮아.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알렉세이는 등정을 고집했다.

8300m의 최종 캠프를 떠난 스타스 크릴로프는 알렉세이를 1시간 동안 기다렸다. 알렉세이는 보이지 않았다. 클릴로프는 알렉세이가 최종 캠프로 돌아간 줄 알고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한참 뒤떨어진 채 올라가고 있었다.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 거리. 이미 오후 5시가 넘었다. 그의 산소는 다 떨어진 상태였다.

스타스 키를로프와 아만 엘레우셰프가 알렉세이를 구하러 나섰다. 퍼스트 스텝과 세컨드 스텝 사이 8600m 지점에서 비박에 들어갔다. 그곳엔 산소통 수십 개가 버려져 있었다. 그 산소통들을 뒤졌다. 조금씩 남아있는 산소를 모았다. 산소마스크를 알렉세이의 얼굴에 갖다 댔다. 덕분에  알렉세이는 아침까지 버틸 수 있었다.

에베레스트 서드 스텝을 올라서는 등반가들. [중앙포토]

에베레스트 서드 스텝을 올라서는 등반가들. [중앙포토]

2001년 5월 24일 에베레스트 등반 중 사망한 러시아의 알렉세이 니키포로프(오른쪽). [중앙포토]

2001년 5월 24일 에베레스트 등반 중 사망한 러시아의 알렉세이 니키포로프(오른쪽). [중앙포토]

5월 24일 이른 아침, 이들은 미국 구조대를 만났다. 미국 상업원정대의 앤디와 제이미를 구하러 올라가던 구조대였다. 구조대는 러시아 팀에게 부신피질 스테로이드와 산소 7리터를 건네줬다. 산소통 고장으로 등정을 포기한 스페인 산악인은 따뜻한 우유를 건네주고 갔다. 알렉세이는 대여섯 걸음마다 한번 쉬었다. 8300m 캠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갑자기 알렉세이가 쓰러졌다. 미국 구조대가 앤디와 제이미를 구하고 돌아오면서 쓰러진 알렉세이를 살펴봤다. 알렉세이의 목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2대 놔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마 뒤, 알렉세이의 시신은 슬로프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에베레스트의 무덤인 북벽으로 떨어진 노란색 옷의 등반가는 알렉세이였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페터 간너가 등반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오스트리아의 페터 간너가 등반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호주의 마르크 아우리히트가 등반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중앙포토]

호주의 마르크 아우리히트가 등반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중앙포토]

5월 23일, 오스트리아의 페터 간너는 남동릉 루트로 오르다 8700m 지점에서 100m 추락했다. 이튿날까지 살아 있었으나 끝내 눈을 감았다.
호주의 마르크 아우리히트도 같은 날 죽음의지대에서 뇌부종으로 사망했다. 그는 등정 중 서드 스텝 부근에서 돌아선 뒤 이튿날 캠프에서 쓰러졌다.

미국의 앤디와 제이미는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대신 앤디는 발가락과 손가락 몇  개를 에베레스트에 바쳐야 했다.

이 2001년 5월 23일에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유난히 몰렸다. 그동안 날씨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6월부터 시작되는 몬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해 5월 이전 에베레스트 등정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날 하루에만 에베레스트 정상에 40명이 넘게 올랐다.

누구는 다시 오지 못할 등정 기회를 잡으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에 들어섰다. 누구는 돈과 시간에 쫓겨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요행은 에베레스트에서 통하지 않는다. 돌아서는 것도 등반 기술이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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