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교류는 남북이 먼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북한의 사회과학원과 미국의 스탠퍼드대 국제전략연구소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북한·미국간에 처음으로 공식 교류관계가 성립됐다.
이것은 비록 민간차원의 비정치적인 교류협정이긴 하지만 이념과 체제 차이로 인한 분단 국가의 일방이 한때 교전관계까지 있었던 상대진영 지도국가와 맺은 협력관계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더구나 한반도주변의 제 세력은 개방과 협력의 국제조류를 외면하고 폐쇄와 고립을 고집하고 있는 북한을 개방시켜 국제무대로 끌어내는 것을 정책과제로 삼고 있다. 한국의 「7·7특별선언」이나 최근 미국의 대북 봉쇄정책 완화의 목적도 거기에 있다.
이번 북한·미국 학술협정은 그 같은 한미 정책변화에 따른 1차 적인 효과일 뿐 아니라 북한이 개방되는 효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적성국 또는 비수교국 사이의 교류에서 학문 교류는 특별한 이점을 갖는다.
정치·군사관계는 하나의 파이를 나눠 갖는 흥정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가장 어려운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스포츠는 물리적 이익이 따르지는 않지만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완벽한 제로섬게임이라는 점에서 부담이 있다. 경제교류는 서로 이익이 되는 비제로섬 관계지만 체제의 우월성을 판가름한다는 점에서 주저해 왔다. 예술교류도 경쟁관계를 유발하고 체제선전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학술교류는 그런 이해와 경쟁에서 벗어나는 영역이다. 그것은 협상과 흥정의 대상도 아니다. 학자들이 하나의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협력하는 과정이다. 파이의 분배도 없고 승패를 가릴 수도 없는 순수한 협력관계만 요구되는 영역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실익과는 거리가 멀다. 바로 그런 점으로 해서 남북관계에서도 소외돼 왔다. 우리 나라에서 문공부장관이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견으로 학술교류를 포함한 남북문화교류회담을 제안한바 있으나 이젠 이를 공식적으로 제안해야 한다.
남북한처럼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는 체제간에는 가장 쉽게 이뤄지고 있는 학술교류가 우선적으로 실시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미국보다는 우리와 먼저 학술교류에 임했어야 하다.
남북한 사이에는 학술교류를 서둘러야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 특히 급한 분야는 고고학과 우리 고대사다. 이 분야는 남북한과 중국의 공동연구 없이는 해명되기 어렵다.
분단이후 남북한에서는 선사시대유물이 여러 곳에서 새로이 발견됐다. 이것을 만주의 유물과 결합시켜 연구할 때에만 당시의 문화양상이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남북교류가 없어 이 분야의 연구는 오히려 남북을 왕래할 수 있는 일본과 중국이 앞서가는 실정이다.
학술교류가 시급한 또 하나의 분야는 국어학이다. 분단 40년을 경과하는 동안 우리 고유의 언어가 점점 이질화하여 생소한 어휘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동질성 문화를 수습하기 위해서도 국어학 교류는 서둘러야 한다.
더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선 북한연구가 붐을 이루고 있다. 분단이후 북한의 사회주의 문화를 연구하는데는 직접교류에 대신될 방법은 없다. 이제 우리는 남북문화회담을 열어 폭넓은 학술교류를 성취해야한다.
북한·미국의 학술교류협정이 이 같은 남북대화의 계기가 된다면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