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농촌에 값폭락 시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대풍농촌에 농민 한숨만 가득하다. 올 채소·고추·참깨·땅콩 등 밭작물과 밤·사과 등 과일농사가 예년에 볼 수 없는 풍년을 맞았으나 값이 폭락. 농민들이 실의에 빠져있다. 이는 담배 경작면적이 줄어든 대신 밭작물재배가 작년보다 늘어난데다 대풍에 따른 수매·계통출하대책이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
이 여파로 농작물 값이 최고 50%나 뚝 떨어져 인건비도 못 건지자 아예 수확을 포기하는 사례까지 잇따르고 있다. 이에 따라 농산물가격파동 만큼이나 수매가격안정 등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시위 회오리가 한차례 몰아칠 전망이다.

<밭작물>
농사가 대풍이면 뭘 합니까. 값이 ×값으로 떨어지니 수익은 제쳐두고 인건비도 건지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농민 김상철씨(53·강원도 영월군 남면 북상리)는 『1천5백 평에서 마른 고추 1천㎏을 생산, 평년작보다 10% 이상 증산했지만 오히려 1백80만원의 적자를 보게됐다』고 한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씨의 올 고추농사 생산고는 6백g 1근에 1천5백원을 셈해 2백40만원선.
이에 비해 소요경비는 종자대 7만5천원, 비료대 9만6천원, 농자재 85만원, 건조기수리 및 상각비 26만4천원, 영농광열비 9만3천원 인건비 2백6만원, 토지임대료 50만원, 영농이자 39만원 등 모두 4백32만8천원.
따라서 김씨의 올 고추농사는 인건비를 빼면 수익이 없어 헛 농사지었다는 결론이다.
고추생산은 풍작으로 늘어났으나 고추 값은 경남지방의 경우 6백g당 상품이 1천5백∼1천6백원선.
이는 지난해 2천5백원∼2천7백원보다 40%이상 떨어져 풍작 속에 소득은 오히려 줄어드는 기현상을 빚고있다.
고추주산지인 경남 창령군 대합면 내무리 최종민씨(40)는 『밭1천 평에 고추를 심어 8월부터 1천6백 근을 딴 데 이어 앞으로도 7백 근을 더 따야할 판이나 고추 값이 계속 내려 인건비도 안돼 수확을 포기했다』고 한숨이다.
최씨는 『작년엔 8백 평에서 1천2백 근을 따 3백만원의 목돈을 손에 거머쥐었으나 올핸 허울좋은 풍년에 빚만 걸머지게됐다』고했다.
경북과 전남지방은 햇 고추 출하 전 6백g 한 근에 2천8백∼3천원선까지 거래되던 것이 이젠 절반 값도 안 되는 1천2백∼1천4백원으로 뚝 떨어졌다.
올 고추 작황은 대풍, 강원도의 경우 10a당 1백80㎏을 따 지난해 1백70㎏보이다 10㎏이나 늘어났고 경북은 올해 5만8천7백18t을 생산, 작년 4만6천2백25t에 비해 27%나 증산됐다.
농민 이현교씨(36·영양군 청기면 토곡리)는 『6천 평에서 5천4백㎏의 고추를 생산했으나 최소한 근당 2천원을 받아야 적자영농을 면한다』며 『영농자금상환은 고사하고 올 겨울을 어떻게 지낼지 모르겠다』며 걱정이 태산.
더우기 앞으로 출하량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어 고추파동이 불가피, 올 고추재배농가들은 죽을 판이라고 농민들은 발을 구르고 있다.
이처럼 고추 값이 곤두박질, 농민들의 아픔을 갈래갈래 찢는 것은 잎담배경작축소로 고추재배면적이 늘어난 데다 과잉풍작에 대한 유통구조체계가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
고추뿐만이 아니다. 얼갈이 무와 배추 값도 마찬가지. 배추의 경우 충북지방에는 지난해 이맘때 평당 2천원선에 밭떼기로 넘겨진 것이 올해는 딴판이다.
평당 6백∼7백원선에 그쳐 지난해에 비해 불과 30%수준에 머물러 재배농민들은 『도대체 영농정책이 있는 것이냐, 아니면 모른 체 하느냐』며 펄펄 뛰고있다.
무도 지난해 평당 1천5백원이 올해는 6백50원으로 무 역시 작년 절반값.
『풍년에 한숨이라니 말이 됩니까』 『풍년만 기대하며 농사짓는 농민들은 죽으란 것입니까』
농민 김영국씨(35)는 『밭에 썩힐 수 없어 1천4백 평에 심은 배추를 평당 6백원씩 받고 팔아 넘겼으나 씨앗 값도 못 건진 「풍년폐농」』이라고 허탈해했다.
이 같은 현상은 땅콩과 참깨에도 미쳐 농민들은 온통 실망상태. 참깨의 경우 경남도는 올해 8천8백33h에서 4천9백t을 생산, 지난해 8천33㏊의 2천7백t보다 80%나 증산했으나 값이 금당 5천8백원으로 떨어졌다. 이는 지난해 ㎏당 6천8백원에 비해 15%나 폭락한 것.
농사관계자들은 외국수입참깨가 쏟아져 대풍 참깨의 값 폭락을 부채질하고 있어 영농정책이 증발된 것이 아니냐고 흥분했다.

<과일>
사과·밤 등 과일류도 마찬가지. 사과의 경우 주산지인 경북 청송·경산의 사과 값이 10년만에 바닥세. 올해 대풍을 이룬 사과 값은 15㎏들이 상자 당 9천5백∼1만1천원으로 작년 1만2천원선에 비해 2천5백원이나 떨어졌다.
충남지방도 상자 당 1만2천원에 거래, 지난해 1만3천7백원보다 무려 1천7백원이 폭락해 농민들은 밭작물 시름에다 과일농사 한숨까지 경쳐 등골이 빠지고 있다.
농민 김영만씨(62·충남 예산)는 『사과 풍작으로 좋아했더니 가격이 X값이라 인건비를 제하면 죽써 개주는 격이 됐다』며 『풍작이면 가격격정, 흉작이면 영농비걱정 등 농정이 농민들만 울린다』고 꼬집었다.
올 밤농사도 대풍을 이뤘으나 값이 폭락, 밤 재배농가들도 아우성이다. 전남 광양·구례 등 산지 농민들은 모처럼의 대풍기쁨을 가격시름으로 대신한 채 실의에 빠져있다.
조생종 수확이 시작된 지난달 초 만해도 상품 1㎏에 1천5백원을 호가하던 것이 만생종 수확철에 접어들면서 값이 곤두박질, 9백∼4백원까지 나뒹굴고있다.
이는 풍작으로 작년보다 30%가량 생산량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출하조절이 안된 홍수 출하 때문.

<문제·대책>
풍년 속의 농민 한숨은 정부당국의 수급조절에 따른 계통출하와 수매량이 절대 부족하기 때문.
고추의 경우 생산량의 10%선에 밑돌아 고추 값 안정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농민 정창수씨(36·경북 안동)는 『당국이 영농자금까지 주며 권장한 것이 언제인데 대풍을 이루자 수매를 외면, 나 모른다는 식으로 등을 돌리는 것은 풍년폐농의 무책임 농정이 아니냐』며 『수매량을 늘려 가격안정으로 농민보호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올림픽기간동안의 2개월 여 행정공백에다 국정감사까지 겹쳐 아무런 대응책이 뒤따르지 않자 지난달부터 전남·경북·충북 등 전국 곳곳에서 터지기 시작한 농민들의 집단요구는 최근 들어 농민궐기대회로 확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 영주·안동 군과 강원도 영월, 충북지방 등에서는 「고향고추 팔아주기 운동」에 나섰다. 농협강원도지회의 경우 8백명의 임직원들이 1인당 10∼30근씩, 경북에서는 직원 1인당 10근씩을 사주고 있으나 한계에 가로놓여 고육지책에 불과한 안타까운 실정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