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제안지도는 '선거판 디지로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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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시민들은 '아고라(광장)'에 모여 정치를 했다. 중요한 정치적 쟁점을 토의해 투표로 결정짓는 직접민주제였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광장 구석까지 자기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턱에 음성증폭장치를 달기도 했다. 또한 논리보다는 군중을 선동하는 수사에 의존하는 일도 많았다. 광장 정치는 자연히 군중 선동가를 배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목청이 작아 뛰어난 식견과 대의를 지니고서도 끝내 정치인이 못 된 이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와는 다름) 같은 불운한 인물을 낳기도 했다.

인터넷은 21세기의 아고라다. 사이버 공간은 광장의 물리적 제약이나 약점에서 벗어나 직접민주제의 이상을 현대에 실현할 수 있게 됐다. 정보기술은 우중(愚衆)이 아닌 '스마트 몹(똘똘한 군중)'을 탄생시키고 조직력이나 금력이 없는 목청이 약한 정치인들도 유권자에게 직접 다가가는 소구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무명 레슬러가 아날로그의 조직력에만 매달려 있던 공화.민주의 양당 후보를 웹 파워로 제압해 주지사에 당선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앙일보가 기획해 만든 '공약은행'과 '공약제안지도'는 정치인과 유권자의 관계를 역전시켰다.

지금까지 정치이념이나 공약은 정치인들이 만들어 내고 유권자는 그것을 일방적으로 소비(선택)해 왔다. 그러나 공약은행의 창설로 선거 사상 처음으로 유권자가 공약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정치인이 소비(이행)하는 길이 열렸다. 이제 후보자들은 정치 소비자(유권자)가 만든 '공약의 고속도로'에 진입해야 제대로 된 정책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됐다.

공약은행엔 개설 30일 만에 2000개 이상의 공약제안이 예금되었다. 전국 230개 시.군.구에 사는 유권자들이 스스로 후보자가 되고 정치인이 되어 공약제안을 올렸다. 이 제안들을 분석해 공약제안지도가 그려졌다.

온라인의 세계이기에 유권자는 조직이나 금력, 목청의 제한을 받지 않고 공약을 제안했다. 오프라인의 현실 세계에선 당선자가 공약을 이행함으로써 디지털과 아날로그 세계의 선순환을 완성할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누가 뱀을 주겠는가"라는 바이블의 말대로 국민의 정치적 요구와 희망을 담은 이 한 장의 지도는 한국의 선거 풍토와 입후보자들의 정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될 것이다. 그리스시대의 아고라가 디지털 시대의 확장성을 만나 정치의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 시대를 구현했다.

공약은행과 공약제안지도는 디지로그를 선거에 적용시킨 지식 생산품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하나의 기적처럼 한국형 '아사달의 광장' 정치가 막 시작되고 있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공약제안지도=전국의 주민들이 어떤 정책을 시행해 달라고 제안한 것을 한눈에 알아보게 만든 지도. 공약제안지도는 중앙일보가 '5.31.joins.com'에 개설한 공약은행에 올라온 정책제안들을 기초로 작성됐다. 유권자들은 공약은행에 공약제안을 예금하고, 후보자들은 이를 대출해 가는 제도다. 본지 5월 1, 2, 4일자에 자세히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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