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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면 사라질 증오 … 이해하면 녹아 버릴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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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 연등으로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 아래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미소가 환하다. 세상 사람 모두 환하게 웃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꿈. 가슴에 연등 하나 켜고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으러 가자. 오종택 기자

사찰마다 거리마다 연등이 물결친다. 조계사 대웅전 뜰 연등 너머 오월의 하늘을 본다. 부처의 미소가 하늘 가득 그윽하다. 저녁 무렵 연등 아래에서 본다. 바람이 맑고 향기롭다. 산하는 해산(解産)의 기쁨에 차 있으리라. 거리 가득 사람들이 분주히 오간다. 아픈 사연 한 둘씩 안고 살겠지. 그래서 부처님.예수님이 오셨을 테다. 부처님 오신 날(5일)을 맞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집무실(서울 견지동 조계사 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만났다. 스님은 사랑과 자비의 보시를 당부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듣고 싶습니다.

"어울려 살아가는 일체생명을 위해 오셨습니다. 억겁(億劫)의 생을 지나며 중생을 사랑한 중생이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범망경(梵網經)에 이르시되 '나는 이미 이룬 부처, 너희는 이제 이룰 부처'라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계시지요. 여러분 하나하나가 다 부처 자격이 있음을 가르치려고 오셨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표어가 '부처님 마음은 어린이 마음'이군요. 마음이 곧 부처라는데, 무엇을 마음밭에 심으면 좋겠습니까.

"은혜를 심으세요. 인연 따라 맺어진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삼라만상 일체 유정(有情)이 각기 유일무이한 불성(佛性)의 현현(顯現)입니다. 오늘 한 떨기 매화는 지난해의 매화도, 내년에 필 꽃도 아닙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하루하루를 은혜를 아는 마음으로 채워 나가야겠지요."

-아기 부처님이 말씀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임제(臨) 선사께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주인공 되고, 서는 곳마다 주체가 되라는 일갈이지요. 우주의 중심은 바로 나입니다. 그리고 나 하나하나가 본래 부처입니다. 버릴 중생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종교는 왜 필요하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물질은 문명을 넘어 물신(物神)의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물신에 눈과 귀가 멀어 내면을 응시할 겨를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 중에 종교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사후의 구원을 약속하는 소극적 역할에 그쳐서는 지구촌의 불행을 막을 수 없습니다. 종교가 오히려 그런 불행의 원인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경계로 삼는 인류의 새로운 자각과 연대가 필요한 때입니다."

-법전 종정께서 '부처님 오신 날' 법어에서 "사랑 속에 깨닫는 이는 예수를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장 스님께서도 최근 천주교 시설인 '성가정입양원'을 방문했습니다. 종교 간 화해와 상생의 광경이 아름답습니다.

"종교는 뜻 그대로 인류가 섬겨야 할 으뜸의 가르침입니다. 상생과 화해는 그 가르침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종교 간에 벽을 쌓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벽은 으뜸의 가르침을 뒤집는 일, 즉 자비를 배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일상으로 실천해 서로 갈라져 불화하는 지구촌에 모범이 됐으면 합니다."

-우리나라는 신자 수가 3000만 명에 달하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이것만은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라고 하신다면 무엇을 권하시겠습니까.

"종교는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사람들이 재물이나 집착 등 외부와 내면에 가진 어둡고 무거운 것을 해제(解除)해 그것들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로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는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행하는 것만이 종교의 존재 이유입니다. '당신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묻지 마시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 또는 자비를 실천하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는 본래 청정심(淸淨心)을 갖고 있다는데 많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모르고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청정심으로 움직이는 '참 나'란 과연 무엇입니까.

"탐욕과 분노.집착 등 욕망의 살림살이를 비운 자리지요. 오늘 한번 내면의 살림살이 목록을 적어 보세요.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해야 할 것들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용서하면 사라질 증오, 이해하면 녹아 버릴 분노 등 얼굴도 이름도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그 자리에 이름과 얼굴이 분명한 이웃과 사물들과 대비심으로 인연 지으십시오. 살림살이가 바뀌고 그 목록을 뒤져볼수록 행복해지실 것입니다."

-조계종단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참구(參究)하는 간화선(看話禪)을 보급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화두 공부를 하면 어떤 변화가 오는지요.

"간화선은 7세기 이후 동북아의 독특한 불교 수행법이죠. 한국의 출가승단이 유일하게 계승하고 있습니다. 겨울과 여름, 3개월씩 모두 6개월간 전국의 선원들은 화두를 들고 치열한 정적을 유지합니다. 지구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광입니다. 이때는 흙으로 만든 소가 물속을 지나가고 나무로 만든 말이 불꽃 속을 무사히 통과한답니다. 한순간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을 어딘가에 붙잡혀 보십시오. 찰나에 1000리를 다녀오고 수만 경계를 돌아다닐 것입니다. 화두는 분열하는 의식을 수렴해 마음의 주인공을 놓지 않는 수행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커집니다."

-산사를 찾을 경우 간혹 어지럽게 불사(佛事.공사)를 벌여 보기가 안 좋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산사가 고색창연하기를 바라지요. 물론 문화유산은 잘 보존돼야 합니다. 그러나 사원은 대중(스님)들이 주야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수행해야 하는 살아있는 공간입니다. 부서져 가는 법당보다는 설왕설래하는 눈 밝은 수행자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용한 산사의 불교는 조선조의 척불(斥佛)과 근대화의 망령이 만들어낸 부정적 유산입니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 불교의 진정한 전통입니다."

-선거철입니다. 정치인들의 필수 예방처가 총무원입니다.

"온몸으로 맞이해야지요. 그들은 국민을 부처님같이 섬겨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그들을 부처님같이 대하고, 그들은 국토중생 모두를 부처님같이 섬기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leehi@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지관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서 대표적인 학승(學僧.학식이 높은 스님)으로 꼽힌다. 불교 금석학(金石學.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옛글 연구) 방면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1932년 경북 영일군 청하면 출생. 47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은사로 득도(得度.스님이 됨)했다. 55년 해인사 강원(講院.사찰의 불교교육 기관)에서 당시 최고의 학승이었던 운허 스님에게 배우며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했다. 60 ~ 70년 해인사 강원의 강주(講主.강원의 대표 강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이어 해인사 주지와 동국대 총장을 역임하는 등 행정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지관 스님이 1일 서울구치소에서 한 사형수에게 계(戒)를 주고 있다. 사진=조계종 제공

'생명 존중' 실천하는 지관 스님
사형수 찾아가 수계법회
3월엔 사형폐지 서명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생명 존중'을 위한 사회 활동이 활발하다.

지관 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5일)을 앞둔 1일 서울구치소를 방문,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수계법회(受戒法會)를 진행했다. 수계법회는 불교 수행자들이 계율을 지킬 것을 맹세하고 법명(法名)을 받는 의식이다. 진정한 불교 신도가 되는 절차로 중시된다.

총무원장의 '사형수 수계법회'는 처음 있는 일이다. 지관 스님은 3월 사형제 폐지에도 서명했다. 그는 "사형제를 폐지하고 종신형을 입법화해야 한다"며 "법과 제도의 미명 아래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박탈하는 사형을 '제도적 살인'으로 규정한다"고 말했다.

지관 스님은 또 지난달 27일 성가정입양원(가톨릭 서울대교구의 아동보호소)을 격려차 방문하기도 했다.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이면 총무원장이 불교계가 운영하는 700여 개의 복지시설 가운데 하나를 방문하던 관례에 비추어 보면 파격이다. 지관 스님은 "부처님 마음은 어린이 마음이다. 종교 간 화합을 위해 가톨릭 시설을 먼저 찾았다"고 밝혔다. 지관 스님은 이 자리에서 어린 생명에 대한 관심과 입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관 스님은 지난해 말 총무원장에 취임하며 전임 총무원장이었던 법장 스님의 장기기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불교는 생명운동 그 자체입니다. 다비를 안 하신 법장 스님의 장기 기증은 생명 보시로 권장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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