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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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같은 나라에 보통사람이 여행 한번 가려면 미리 갖추어야할 조건이 있다. 간을 꺼내 선반 위에 올려놓거나 비위가 좋아야 한다.
이 말 뜻을 못 알아듣는 사람을 위해 그 나라 비자를 신청할 때 구비해야하는 서류를 챙겨보자. 여자의 경우 호적등본을 영문으로 번역할 것. 배우자의 영문재직증명서, 갑근세 납부증명서, 재산세 납부증명서, 은행의 예금잔액증명서, 때로는 자동차 운전면허증까지도 구비해야 한다.
이런 서류를 갖출 만 하면 벌써 보통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서류를 한 뭉치 들고 가도 그 자리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운수가 썩 좋으면 그날 오후, 아니면 그 다음날에 받으러 오라는 판정을 받아도 운수 좋은 편이다. 미국은 요즘 1주일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이처럼 까다롭게 구는데는 까닭이 있다. 비자 받으러 오는 사람은 일단 불법체류의 예비적 우범자 취급을 하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는 다르다. 그처럼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 유럽은 단기여행자와 장기여행자로 나누어 단기의 경우 3개월 단기 비자를 내준다. 단기비자를 가진 사람이 그 기간이상 머무르면 가차없이 법으로 제재한다. 추방하거나 벌금을 물리고 추방한다. 비자를 주느냐, 마느냐를 따지기보다는 비자 후를 철저히 관리하는 방식이다.
적어도 그 나라가 좋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손님대접을 받는다. 돈지갑을 열어보라는 식은 아니다.
비자 처리가 늦어지는 까닭을 일손이 모자란다는 말로 설명하는 대사관도 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셈 법이다. 관광객이 많으면 그 나라 국민소득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관광하러 가는 사람이 빈손 들고 여행할 리 없다. 일손을 늘려도 그 나라는 손해볼 것이 없다.
우리 정부도 그렇다. 진작 해외여행자유화를 했으면 국민의 그런 고충도 알고 있어야 한다. 거위에 접시물 주는 격이지 비자 없이 어떻게 여행을 자유로이 가라는 말인가. 비자발급의 편의까지도 외교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순서다.
더구나 국민들이 외국여행 비자도 마음대로 받기 어려운 형편이 되어서야 어디 나라 체면이 서는가. 우리도 이제는 국민의 자존심을 생각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
마침 주한 미대사관은 비자의 당일 발급을 발표했다.
미국정부도 뒤늦게 무슨 눈치를 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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