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누드모델 “문 잠가 달라” … 교수 “왜 까다롭게 구나” 갑질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92호 03면

[SPECIAL REPORT] 모델의 현주소

지난 5월 1일 발생한 홍대 몰카 유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출된 문제의 사진은 여전히 모자이크 없이 ‘워마드’ 사이트를 떠돌고 있다. [뉴스1]

지난 5월 1일 발생한 홍대 몰카 유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출된 문제의 사진은 여전히 모자이크 없이 ‘워마드’ 사이트를 떠돌고 있다. [뉴스1]

2년차 누드모델인 M(31·여)씨는 지난해 말 지방의 한 미술대학 소묘수업에 나갔다 느낀 당혹감을 잊지 못한다.

“까칠하다 소문나면 일감 뚝 끊겨” #에이전시·모델, 대학에 쩔쩔매 #표준계약서도 없어 복지 지원 사각 #“젠더 감수성 키울 예술윤리 교육을”

출입문을 잠그지 않은 채 수업을 진행하려던 교수에게 “문을 잠가 달라”고 재차 요청했지만 교수는 오히려 정색을 했다. 교수는 “돌아다니는 사람도 다 학생들인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느냐. 에이전시에 말할 테니 다음부터 나오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3주 연속 잡혔던 M씨의 스케줄은 그날로 끝났다. M씨는 “출입 통제에 무관심한 교수들이 많아 매번 블라인드와 출입문을 스스로 확인한다”며 “심지어 문을 활짝 열고 수업하려는 경우도 있지만 일이 끊길까 두려워 참는다”고 말했다. 수업 중 외부인이 들어와 화들짝 놀라거나 카메라 셔터 소리에 소름이 돋는 일은 모델들에겐 흔한 경험이지만 알몸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즉각 맞서기란 쉽지 않다. 모델 P씨(23·여)는 “바닥이 좁아서 ‘까칠하다’ 소문나면 바로 수업이 끊긴다. 매너 없는 태도나 불결한 환경도 견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누드크로키는 대학을 넘어 백화점 문화센터와 각종 평생교육기관, 동호회 등으로 대중화되고 있다. 영화·방송 제작사가 노출 대역을 요청하는 일도 늘고 있고, 게임 업체가 인체 동작을 3D 스캔하기 위해 누드모델을 찾기도 한다. 간혹 작가나 교수와의 개인적 인연으로 일하는 순수 프리랜서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모델은 한국누드모델협회·에덴에이전시 등 5~6개의 에이전시를 통해 일감을 찾는다. ‘대학→에이전시→모델’의 갑을관계로 엮여 있는 누드모델 공급 구조에서 최대 수요자인 미술대학은 수퍼 갑이다.

시급 3만~4만원에 수수료만 20~35%

경찰의 수사를 편파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은 주말마다 서울 대학로 등을 가득 메우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의 수사를 편파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은 주말마다 서울 대학로 등을 가득 메우고 있다. [연합뉴스]

모델의 시간급은 한 번 수업에 2~3시간 정도 이어지는 누드크로키의 경우 3만~4만원 선이다. 전업 모델인 Q씨(28·여)는 대학 개강으로 가장 일감이 많은 시기인 지난 3월 26회 수업에 나가 모델료로 330만원을 벌었다. 통상 에이전시는 모델료 중 20~35% 정도를 수수료로 떼어 간다. 수수료도 만만치 않지만 여름·겨울 방학에 찾아오는 소득 절벽이 모델들에겐 가장 큰 생계 위협이다.

이런 구조에서 수업 진행자 또는 학생들과 모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에이전시들이 모델의 권익을 제대로 대변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영세한 개인사업자인 에이전시들도 주요 미술대학과 거래가 단절되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한 3년차 누드모델은 “수업 중 트러블이 생겨 에이전시 대표에게 이야기했더니 ‘좀 참지…’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누드모델과 관련해 ‘-협회’라는 상호가 여럿 보이지만 모델의 권익을 대표하는 단체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들일 뿐이다. 모델 Q씨는 “모델을 빼가는 과정에서 갈등이 빈발할 만큼 에이전시 간 경쟁이 치열하다”고 귀띔했다. 누드크로키 모델료가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인 것도 절대적 갑을 관계와 업계 내부의 치열한 경쟁의 결과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누드모델들은 복지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시나리오 작가 고(故) 최고은의 사망을 계기로 문화체육관광부는 2012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설립해 창작준비금 및 의료비 지원, 무료 법률상담과 심리상담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누드모델은 이 같은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표준 계약서와 소득세 납부증명 등이 있어야 신청할 수 있지만 소득이 부정기적인 데다 계약서 한 장 없이 일하는 모델이 많기 때문이다. 최근 소속 에이전시를 바꾼 한 여성 모델은 “계약서 없이 모델의 실수나 지각에 대한 불이익을 명시한 ‘지침서’만 내미는 에이전시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관계자는 “서류로 공개적인 활동을 입증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지원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술대학 내 권력 남성 집중, 변화 소극적”

몰카 유출 사건 발생 3일 만인 지난 5월 4일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는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누드모델 수업 매뉴얼’을 게시했다. 출입문을 반드시 잠그고 시작하고 ▶수업 시작 후 출입을 금하며 ▶휴대전화는 전원을 끈 뒤 지도교수에게 제출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특히 매뉴얼 6번 ‘수업 윤리 교육 안내’ 항목에는 “누드모델을 촬영해 무단 배포하는 행위는 성폭력처벌특례법에 따라 처벌되는 행위라는 점을 학생들에게 교육하라”는 지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매뉴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문체부 산하 성평등문화정책위원회 이혜경 위원장은 “젠더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이 절실하지만 ‘예술 윤리’ 과목은 전무한 게 우리나라 예술교육의 현주소”라며 “예술대학 내의 권력이 남성들에게 집중돼 변화에 더 소극적인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주요 미술대학 가운데 정규 교육과정 중에 윤리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 중앙SUNDAY가 서울대·홍익대·국민대·고려대·건국대·서울시립대·성균관대·이화여대·성신여대·동덕여대 등 서울 시내 10개 미술대학에 문의한 결과다. 누드모델 수업과 관련한 별도의 성폭력 예방 특강을 진행하는 학교도 거의 없다. 익명을 요청한 한 미술대학 관계자는 “실기 교수들이 수업 중간중간에 주의를 주는 정도가 전부”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가이드라인 운영과 표준 계약서 활용을 강제하는 제도 설계도 필요하지만 교육 현장이 능동적으로 성과 인간관계에 대한 인지 감수성을 키우는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정권·임장혁 기자, 안희재 인턴 기자 deepe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