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모델은 정물이 아닌 사람, 예술의 파트너로 봤으면”

중앙선데이

입력 2018.07.14 01:57

업데이트 2018.07.1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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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호 04면

[SPECIAL REPORT] 나는 모델이다
누드모델 김경진씨는 지난달 24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 스튜디오를 찾았다. 김씨는 ’누드화라는 장르는 존재하는데 누드모델은 예술인으로도 노동자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누드모델 김경진씨는 지난달 24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 스튜디오를 찾았다. 김씨는 ’누드화라는 장르는 존재하는데 누드모델은 예술인으로도 노동자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3년차 누드모델 김경진(28)씨는 지난 3월 세종대 수업에 나갔다가 웃음이 터졌다.

여성 페미니스트 전업 모델 김경진
성폭행 피해 치유 위해 활동 결심
터부에 맞서 내 몸 드러낼 권리 실현

그림 그린 뒤 울며 고마워할 땐 뿌듯
거의 대부분 모델은 생계 위해 투잡

밟기에도 께름칙할 정도로 더러운 군용 모포였던 무대 위에 어떤 학생이 깔아 놓은 ‘헬로 키티’ 담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담요 옆엔 간식거리도 놓여 있었다. 4주 동안 계속되는 수업의 2주 차에 생긴 일이다.

“첫 수업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 쉬는 시간에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그림과 신체 특징에 관해 말을 건넸어요. 그제야 저를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거죠. 3~4주 차에 접어들면서 그림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게 신기했어요. 결국 무대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인 거죠.”

김씨는 자신의 몸짓으로 상대방의 감성과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김씨는 페미니스트다. 지난해 초부터 한 진보정당의 여성주의자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사회적 터부였지요. 자신의 선택으로 내 몸을 드러낼 권리를 실현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시선에 맞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배우다 중퇴한 김씨는 영상제작 프리랜서를 거쳐 2016년 말 누드모델에 도전했다. 지금은 흔치 않은 전업 누드모델이다.

왜 누드모델이 됐나.
“20대 초반부터 찍고 싶은 다큐멘터리가 있었어요. 성폭행 생존자들의 담담한 일상과 진술을 담는 거였죠. 사회적 타살의 위기에서 벗어난 이들을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 부르죠. 그 계획 속의 마지막 등장인물은 저였어요. 저를 성폭행한 가해자를 찾아가 묻는 장면.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남들에겐 그러라고 말하면서 정작 저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죠. 치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누드모델을 생각하게 됐어요.”
‘치유’를 위해선 다른 방법도 있지 않나.
“상담을 받아 봤어요. 상담자가 이야기를 듣더니 ‘잘 극복했다’ ‘나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뭔가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전제로 말하는 거죠. 나는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길을 찾고 싶은데 ‘극복했다’는 말이 와닿지 않더군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누드 모델링의 치유적 효과라면.
“인체에는 그 사람의 역사가 담겨 있어요. 몸과 마음의 역사가 나이테처럼 새겨지는 거죠. 모델링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모델링 현장에서 성폭력을 경험했다는 모델도 많다.
“저도 처음에 내 의도와 다르게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지금은 별로 개의치 않아요. 도가 넘는 행동은 그 자리에서 항의를 하죠. 한 번은 대학 수업에서 남학생 무리가 모여 키득키득하길래 쉬는 시간에 가서 그림을 보여 달라고 했어요. 가슴만 엄청나게 크게 그려 놓았더라고요. 모멸감이 들어 학생과 교수님에게 ‘이 그림이 뭘 의미하느냐’고 따졌지요. 다행히 교수님이 저보다 더 크게 화를 내줬어요. 아이들을 퇴실시키고….”
대학 수업에 많이 가는데 에티켓과 윤리에 대한 교육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느끼나.
“안 하는 것 같아요. 휴대전화 사용이 얼마나 큰 위험으로 다가오는지, 가운을 입기 전에 출입문을 여는 게 얼마나 불쾌한 일인지 등을 알려주면 좋겠어요. 교수님들에게 물어보면 ‘당연한 매너인데 꼭 가르쳐야 되느냐’는 답을 듣곤 하죠. 서로를 사람으로 바라보면 안 할 수 있는 실수인데….”
‘좋은 직업’이라고 느끼는 순간은.
“간혹 화실에 가서 몰입해 포즈를 하고 나면 그림을 그린 뒤에 우는 분들이 계세요. ‘어떤 느낌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줘 고맙다’고 우세요. 그런 분들 보면 꼭 한 번씩 안아 드리죠. 저도 고마워서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지으면서 예술도 탄생하는 것 아닌가요. 모델링 자체가 상당히 적극적인 의사소통 행위라고 생각해요.”

일상적이지 않은 자세로 짧게는 한 번에 1~3분씩, 길게는 20분 이상 버텨야 하는 모델링은 상당한 육체 노동이다. 손목 연골이 닳아 없어지거나 골반이 뒤틀려 걷기 어렵다고 ‘직업병’을 호소하는 모델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노동자로서 보호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투잡을 뛰는 사람이 많다던데.
“거의 대부분이에요. 연극 배우를 겸하는 사람도 있고, 편의점 아르바이트 같은 아예 관계없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 경우 모델링에 집중하기를 기대하기 어렵지요. 제도적 안전망이 전무합니다. 사회적 생존권을 보장하는 게 예술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모델들이 몸을 관리하고 내면에 침잠할 수 있어야 그림도 좋아질 수 있지 않겠어요.”
에이전시가 보호막이 되나.
“활동 중 불이익을 당할 때 보호받고 싶은 마음에 대부분 에이전시에 소속돼 일해요. 우리 회사는 비교적 나은 편이지만 에이전시들이 일반적으로 그런 기능을 제대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저도 이전 소속사에서는 계약서도 없이 1년 넘게 일했죠.”

김씨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오는 9월 열리는 누드 아트 퍼포먼스 ‘폴리페몬브레이크’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공연 무대에 관심이 생겨 최근엔 현대무용도 배운다고 한다.  “모델 일을 하기 전에는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지냈어요. 소질을 새로 발견한 것도 모델링이 가져다 준 선물이죠.” 김씨는 마지막으로 “누드모델을 정물이거나 신비한 ‘뮤즈’이기 전에 사람으로, 예술의 파트너로 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시선과 문화가 자리 잡아야 홍익대·전남대 사태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특별취재팀=이정권·임장혁 기자, 안희재 인턴 기자 deep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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