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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단지 인생을 잘못 산 인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92호 32면

책 속으로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장정일 자선시집, 책읽는섬

장정일·박철·이영광 나란히 신간 #이 시대 고통을 타전하는 소리들 #외롭고도 의로운, 그 길을 가리라

끝없는 사람
이영광 지음, 문학과지성사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박철 지음, 창비

누군가 말했다. 시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세상에 존재하는 시인의 숫자만큼이나 많다고. 시인마다 시론(詩論)이 있다는 얘기다. 문장을 뒤집으면 시 독자는 행복하다. 그만큼 시 세상이 다채롭다는 얘기니까. 소개하는 세 시집은 다채로움에 다채로움을 더하는 ‘물증’들이다. 한데 묘하다. 각각의 시론이나 시적 태도가 심상치 않은 대비를 이룬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영광·박철·장정일 시인. 새 시집을 나란히 냈다. [사진 창비, 중앙포토]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영광·박철·장정일 시인. 새 시집을 나란히 냈다. [사진 창비, 중앙포토]

먼저 장정일. 소설이나 칼럼에서 도발적인 그는 시에서는 삐딱하다. 1983년 동인지부터 91년 시집까지 발표한 전체 시 중에 가려 뽑은 자선시집(자기가 골랐다는 뜻이다)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스님이 그냥 스님이듯 시인은 그냥 시인이다. 제 좋아서 하는 일이니 굳이 존경할 필요도 없고 귀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시나 모국어의 순교자가 아니라, 단지 인생을 잘못 산 인간들일 뿐이다.”

문학 엄숙주의에 염증 느끼는 독자들의 속을 시원스럽게 뚫어주는 큰 목소리다.

끝없는 사랑

끝없는 사랑

비상하게 진지한 이영광 시인에게 시는 고통 가운데 터져 나오는 신음 같은 것이다. 새 시집 『끝없는 사람』 뒷표지 시인의 말에서 그렇게 썼다. 언어로 분절되지 못한 것이니 신음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런데 신음은 침묵에 이어져 있다. “침묵의 미궁에 빠진 영혼이 어쩔 수 없이 타전하는 모든 종류의 기척과 신호”가 바로 시라는 게 이영광의 시론이다.

박철의 시론은 ‘시인의 말’ 만으로는 불분명하다. “내 나름의 시 이론서를 하나 쓰고 싶었으니, 이 책으로 대신한다”고 썼으니 모종의 시도를 한 것만은 틀림없다. 새 시집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에 실린 한 편 한 편을 찬찬히 뜯어볼 수밖에.

『라디오같이…』에서 눈길을 붙드는 건 88년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 실린 ‘삼중당 문고’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 /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격한 감정이 야기하는 사람 몸의 극적 변화를 이영광만큼 속필로, 실감나게 잡아채는 시인도 드물 것 같다.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분노는 말을 때린다/ 말은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무섭다/ 말은 눈물을 뿌리며 달린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닿아야 분노에/ 맞지 않을 수 있나/ 분노를 떨어뜨릴 수 있나/ 질주하는 말은 분노의/ 헝클어진 발음기호다/ 말은 분노를 흐느낀다/ 분노는 말에 매달린다/ 분노는 말을 더듬거린다”.

‘말’ 전문이다. 시인의 관찰 대상이 된 사람은 분노에 떨며, 더듬거리며, 말처럼 내달리는 말 아닌 말을 하고 있다.

시집 제목과 관련된 듯한 작품 ‘촛불’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리바이어던에 맞먹는 ‘백만 촛불’이 전지전능을 뿜어낸다.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에서 대책 없이 낭만적이고 선한 ‘일(一)인’을 재현했던 박철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모습이다. 첫머리 ‘빨랫줄’부터 눈길이 머문다.

박철의 시론은 아마 ‘너와 나’ 같은 작품에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된 게 아닐까.

“외롭지 않고 의롭기 쉽지 않거니와/ 의롭지 않은 외로움 또 어디에 쓰나”라고 했다. 시가 그렇고 시인이 그런 것일 게다. 외롭고 의로운. 물론 이건 박철의 시론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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