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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망할 거, 다 같이 잘 망하자. 아름답게!

중앙일보

입력

영화 '나와 봄날의 약속' 한 장면.배우 강하늘이 연기한 영화감독(가운데)을 제외하면 모두 외계인들이다. [사진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영화 '나와 봄날의 약속' 한 장면.배우 강하늘이 연기한 영화감독(가운데)을 제외하면 모두 외계인들이다. [사진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종말을 주제로 한 이런 상상은 처음이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나와 봄날의 약속’은 지구 멸망 하루 전날 지구에 잠입한 외계인들이 생일을 맞은 네 사람에게 생일선물을 준다는 내용의 SF다. 외계인이 야쿠르트 배달원(이혜영 분), 고물 택시를 모는 옆집 아저씨(김성균 분) 등으로 변장해 찾아온다는 설정이다. 선물의 정체도 허를 찌른다. 끝도 없이 음울하고 괴괴한 발상에 다음 장을 재촉하게 되는 암흑동화 같달까. 올해 초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 타이거 국제경쟁부문에 한국영화로는 유일하게 진출했다.

음울하고 독특한 저예산 지구 종말 SF #'나와 봄날의 약속' 백승빈 감독 인터뷰 #"돌아가신 어머니 일기장이 영감의 원천, #이 세상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위로 되길"

순제작비 1억원으로 4년에 걸쳐 어렵사리 완성한 저예산 영화. 그런데도 김성균‧장영남‧강하늘‧이혜영 등 기성 배우들이 출연을 자처한 건 “이런 이야기를 쓴 감독이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화를 연출한 백승빈(41)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작품 ‘장례식의 멤버’(2008)로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 등을 수상했던 신예. 10년 만에 두 번째 장편으로 돌아온 그를 후텁지근한 여름 초입 서울 정동에서 만났다.

백승빈(41) 감독이 지난달 25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백승빈(41) 감독이 지난달 25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F 영화론 특이한 제목이다.  
“‘어차피 망할 거, 다 같이 잘 망하자. 아름답게!’란 극중 대사가 세상을 보는 제 관점이다. 다 망하고 ‘리셋’하면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과 염원을 제목에 담으려 했다.”

-왜 어차피 망한다고 보는 건가. 
“왠지 모르게 어릴 적부터 종말이란 주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살한 시인과 작가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관심이 많았다. 외로울 땐 상상 속 괴물에게 의탁했다. 죽음으로 얽힌 가족을 그린 첫 장편 ‘장례식의 멤버’는 사실 제 무의식을 많이 반영한 얘기였다.”

영화 '장례식의 멤버'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장례식의 멤버'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이번 영화는 어떻게 착안했나.  
“첫 장편 이후 오래 준비한 영화들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번 엎어졌다. 다 정리하고 고향 대구로 내려갔다. 한때 오래 몸담았던 영어 입시학원 강사 일을 다시 해볼까 싶은 유혹도 있었다. 감독이 내 천직이 맞는지 인생 최고로 고민했던 시기에 이 얘기가 떠올랐다. 첫 에피소드를 찍었을 때가 2014년 12월 즈음이었다. 여러 제작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에 살을 붙여나갔다.”

-외계인 대장을 야쿠르트 배달원의 모습으로 설정했는데.  
“외계인이 인간세계에 잠입한다면 다들 ‘야쿠르트 아줌마’로 변장할 거라 생각했다. 가장 안전한 모습으로 인간 사회 곳곳에 침투할 수 있어서다(웃음).”

'나와 봄날의 약속' 해외 포스터 [사진 마일스톤컴퍼니]

'나와 봄날의 약속' 해외 포스터 [사진 마일스톤컴퍼니]

외계인에게 최후의 선물을 받는 네 사람은 “지구 멸망을 끌어당길 것 같은 우울한 아웃사이더들”이다. 낭만주의 영미문학을 가르치지만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 없는 대학교수(김학선 분), 10년째 영화로 찍지도 못할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젊은 감독(강하늘 분) 등 실제 대학에서 미국학‧영문학을 공부한 백승빈 감독이 자신의 일부를 떼어 만든 분신 같은 캐릭터가 기이한 매력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흉측한 괴물그림에 빠진 ‘강철 멘탈’ 왕따 여중생(김소희 분)의 스케치북은 그가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손수 채웠다.

 백 감독은 “저마다 만나는 외계인은 사실 그들이 불러낸 저승사자”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외계인의 선물은 받는 사람이 절실히 원했기에 달콤하지만, 위험한 대가가 따른다.

 예컨대 독박 육아에 지친 가정주부(장영남 분)에겐 대학 시절 여성 인권 동아리 후배 모습의 외계인이 찾아와 잊고 있던 투쟁 본능을 일깨운다. 최근 5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독전’(감독 이해영)으로 주목받은 배우 이주영이 이 대범한 여대생 외계인 역을 맡았다. 둘은 약에 취해 가부장적 세상의 억압에 맞서지만, 종국엔 치명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대학 시절 여성 인권 운동의 대모였지만 이젠 평범한 가정주부가 된 지구인(장영남 분)에겐 그를 우상처럼 생각하는 대학 후배로 위장한 외계인(이주영 분)이 찾아와 뜨거웠던 시절의 혈기를 되살려준다. [사진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대학 시절 여성 인권 운동의 대모였지만 이젠 평범한 가정주부가 된 지구인(장영남 분)에겐 그를 우상처럼 생각하는 대학 후배로 위장한 외계인(이주영 분)이 찾아와 뜨거웠던 시절의 혈기를 되살려준다. [사진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어두운 이야기지만, 따스한 위로가 섬광처럼 스치는 순간도 있다. “내가 죽으려고 이런 (종말적인) 시나리오만 쓰는 걸까.” 영화에서 넋두리처럼 되뇌는 무명 감독의 다친 팔에, 외계인 대장은 ‘봄날은 온다’고 적어준다. 비록 내일이 종말일지언정 무명 감독에겐 평생 갖지 못한 희망을 품게 해주는 말이다. 영화에 나온 글씨는 백승빈 감독이 직접 썼다. 로테르담영화제에선 문신을 하려는 듯 이 문구를 깨끗하게 써달라는 외국인 관객이 있었다.

“울컥했어요. 제 영화는 작가주의 영화나 상업영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늘 양극단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왔거든요. 하지만 나처럼 외로운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더 있구나, 알게 됐을 때 받는 위안이 있잖아요. 제 이야기에 힘을 얻을 분들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더 단단히 먹으려 합니다.”

다만, 영화제에서 먼저 만난 일부 관객이 극중 여성 캐릭터를 두고 남성 중심적 시선에서 대상화된 듯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비판한 데 대해선 “나름대로 강인하고 흔치 않은 여성상을 연기해온 배우들을 캐스팅해 기존 인식을 뒤집어보려던 연출인데 치밀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2007년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절대악몽(호러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백승빈 감독의 영화 '프랑스 중위의 여자' 한 장면. 작가지망생인 주인공 소년의 어머니가 죽기 직전 자신이 영국 소설 『 프랑스 중위의 여자』 속 여주인공이라고 고백하면서 시작된다. 감독이 자전적 경험담을 각색한 이야기다. [사진 백승빈]

2007년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절대악몽(호러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백승빈 감독의 영화 '프랑스 중위의 여자' 한 장면. 작가지망생인 주인공 소년의 어머니가 죽기 직전 자신이 영국 소설 『 프랑스 중위의 여자』 속 여주인공이라고 고백하면서 시작된다. 감독이 자전적 경험담을 각색한 이야기다. [사진 백승빈]

더 큰 제작 규모가 허락된다면,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한국 무대로 옮겨보는 게 꿈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이를 질문해보고 싶다”고 했다. 또다시 ‘죽음’이란 화두다. 왜 계속해서 죽음을 파고들까.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대답 대신 가방에서 낡은 노트를 하나 꺼냈다.

“어머니가 남긴 일기장이에요. 책과 영화에 빠져 자랐지만, 창작하게 된 계기는 20대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영화학교에 들어가면서였어요. 어머니가 가시기 전 저한테 어떤 비밀을 안겨주셨거든요. 왜 그런 얘기를 하셨을까. 10대 시절 내내 저를 이모처럼 챙겨줬던 어머니의 많은 친구는 왜 장례식에 한 명도 안 왔을까. 왜 약속이라도 한 듯 제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졌을까. 이런 의문이 어쩌면 죽음에 대해 제가 가진 애착의 뿌리인지도 모르겠어요. 1970년대부터 어머니가 쓴 이 일기를 조금씩 꺼내보며 풀리지 않는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려보곤 합니다. 창작자가 흥미로워지는 건 결국 자신이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를 진정으로 마주하게 될 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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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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