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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집사] #18. 당신에게 '아는 집사'가 있다면, 이런 말은 넣어두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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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 기사에 이상한 댓글이 왜 이렇게 많아요? 완전 ‘마상’이에요!”

몇 달 전, 포털 사이트에서 내 기사를 검색해 보던 친한 동생이 링크와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마상’이 뭐냐고 물었더니 ‘마음의 상처’란다. 악플 세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로 기사를 쓸 때 흔히 겪는 일이다.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놓고 일하다 보니 인신공격성 댓글도 없지 않다. 크게 신경은 안 쓴다. 타당한 비판이라면 곱씹어 마음에 새기겠지만, 대다수는 맥락 없는 막말이다. 싫은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성격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백수진의 어쩌다 집사] #(18) 상처가 되는 말들

그런 나를 수시로 예민하게 만드는 주제가 생겼다. 그 주제를 건드리는 말들은 귀에서 귀로 흘러나가다 말고 바늘이 돼서 마음을 콕콕 찌른다.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매번 정색하고 따지지는 못한다. 어색하게 웃어넘기며 ‘앞으로 이 사람과 대화할 때는 다른 얘기만 해야지’하고 다짐할 뿐이다. 웬만해선 상처 입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자꾸만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나의 치명적인 약점. 나의 고양이다.

쇼핑백을 바닥에 눕혀 놓으면 어김없이 나무가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목덜미를 만져주면 좋아하지만 언제 갑자기 돌변해 손을 깨물지 모르는 일이다.

쇼핑백을 바닥에 눕혀 놓으면 어김없이 나무가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목덜미를 만져주면 좋아하지만 언제 갑자기 돌변해 손을 깨물지 모르는 일이다.

결혼 적령기의 미혼 여성이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면 세상은 이를 ‘비혼 선언’쯤으로 받아들인다. ‘자취·자차(자기 소유 차량)·육묘’는 시집가기 어려운 3대 조건으로 꼽힌다. 나무를 데려온 이후, 근황을 묻는 말에 “고양이를 키운다”고 답하면 “시집 안 가려고?”라는 질문이 꼭 따라붙었다. 더러는 걱정을 동반한 진심이었고 더러는 가벼운 농담이었다. 유사품으로는 “네가 고양이 키우니까 남자친구가 없는 거야”가 있다. 세상은 같은 연령대의 견주에 비해 고양이 집사의 연애와 결혼을 유독 우려한다. 왜일까.

고양이가 결혼 욕구를 꺾어버릴 정도로 매력적임을 인정하는 거라면 굳이 반박하고 싶진 않다.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요네하라 마리 저)」라는 책이 있듯 누군가는 반려동물이 주는 행복이 여생을 살아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고양이 때문에 비혼 하는 사람은 다른 이유로도 비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결혼을 절대적인 의무로, 모든 것 위에 있는 가치로 보지 않을 뿐이다. 일이나 신념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여성과 다르지 않다. 고양이가 ‘비혼 바이러스’ 따위를 퍼뜨려서 젊은 여성들의 뇌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남자친구가 고양이를 싫어하면 어떡할 거야?”

역시 공식 질문이다. 답변을 녹음한 음성 파일을 스마트폰에 넣어 다니고 싶을 정도다. 나의 입장은 명쾌하다. 나는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과 굳이 연애하지 않을 것이므로 ‘남자친구가 고양이를 싫어한다’는 명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고양이를 열과 성을 다해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고양이가 아니라 어떤 동물이든 마찬가지다. 나무를 향한 나의 사랑을 진입장벽으로 여기는 상대 역시 타협할 수 없는 사람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너무도 당연한 얘기다. 외모·성격·가치관 등 이성을 파악할 때 살펴보는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시간 낭비하는 경험을 거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무의 존재는 오히려 이롭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아니, 만약에. 만약에 말야”하며 집요하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대답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남자친구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자신을 포기할지, 여자친구를 포기할지. 후자라면 쿨하게 보내드리겠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끌고 와 고민의 난이도를 높이기도 한다.

“결혼했는데 남편한테 고양이 알러지가 있으면 어떡해?”

이는 확실히 어려운 질문이다. 아니, 어렵기보다 슬프다.

나부터가 고양이 알러지로 고생하며 나무를 키우고 있지만 같은 희생을 가족에게 강요할 순 없다. 나무의 생명이 소중하듯 앞으로 생길 가족의 건강도 물론 소중하다. 두 가지를 놓고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건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이상형 월드컵 하듯 웃으며 양자택일할 주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나무의 보호자다. 나무에 대한 나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 방법이 나무가 내 품을 떠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두렵다. 이토록 무거운 이야기를 왜 속없이 웃으며 해야 하는 걸까.

비록 귀여운 개냥이인척 하며 밥을 얻어먹고 살지만 자신은 사실 무시무시한 맹수임을 집사에게 각인시키는 중이다.

비록 귀여운 개냥이인척 하며 밥을 얻어먹고 살지만 자신은 사실 무시무시한 맹수임을 집사에게 각인시키는 중이다.

고양이는 1년만 살면 성체가 된다. 혼자서 걷고 밥을 먹고 화장실도 간다. 사람 아이와 비교하면 혼자 둬도 큰 문제가 없는 건 맞다. 그래선지 늦은 밤 술자리 등에서 이런 말을 듣곤 한다. “고양이는 혼자 둬도 괜찮아~” “밥 좀 늦게 줘도 괜찮아~” 그건 내가 그 자리에 오래 남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말이지 남한테 들을 소린 아니다. 강아지만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고양이도 외로움을 탄다. 이는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하지만 맘 속에 싹 트는 고양이 걱정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유난스럽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더 정들기 전에 내다 버려”라는 말도 하도 들어서 이젠 내성이 생겼다. 가족을 어디에 어떻게 버리라는 건지 모르겠다. “고양이 키우면 병 걸린대.” 놀랍게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집냥이보다는 길냥이나 외출냥이가 많고 예방접종이 잘 이뤄지지 않았던 옛날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광견병 등 감염병 예방접종을 마치고 거의 평생을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고양이로부터 병을 옮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리온 동물병원 이미경 원장은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감염되는 인수공통 감염병은 곰팡이성 피부병 정도인데, 이마저도 100% 치료가 가능해 예방접종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나무도 나에게 상처를 준다. 내 손등과 팔, 발과 다리 어느 한 곳에는 언제나 나무의 발톱 자국이 있다. 때론 코끝이나 입술을 깨물기도 한다. 정말 아프게 할퀴어질 때도 있지만 대체로 신나게 놀다가 나도 모르는 새에 생기는 영광의 상처들이다. 집사에게 아무 말이나 던져 속을 뒤집어 놓은 이들이 꼭 묻는다. “안 아파? 난 고양이는 진짜 못 키우겠다….” 글쎄. 당신들이 하는 말이 고양이 발톱보다 몇 배는 더 아프다.

글·그림=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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