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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법치 훼손하는 경제 ‘가이드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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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종윤 논설위원

김종윤 논설위원

법치주의 틀이 짜인 건 17세기 이후다. 자유주의 국가관이 뿌리내리면서다. 권력은 유권자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권력을 쥔 자는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을 위해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철학이 자리 잡았다. 남은 질문은 “어떻게 권한을 행사할 것인가”였다. 답은 국민이 합의해 만든 법률에 따라서다. 한국에서도 법치는 숭고한 가치다. 헌법 66조 2항은 대통령에게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부여한다. 69조는 대통령이 헌법을 준수한다는 선서를 하도록 규정했다.

대기업 지분 매각 강요 가이드라인은 법치 위배 #선한 의도라도 법률이 정한 권한 넘어서면 안 돼

법은 정의의 수호신이라는 믿음이 깔려야 한다. 법치가 흔들리면 사회에는 분열과 불신, 갈등의 골이 파인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지난달 취임 1주년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는 편법적 경영권 승계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생태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근절해야 한다. 일감 몰아주기는 지배주주 일가가 비주력·비상장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면서 발생한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다음 발언이다. “(대주주 일가에 비주력 계열사의) 지분을 팔라고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지만 그런 구조가 계속 이어지면 공정위의 조사 대상이 될 것이다.”

2013년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면서 일감 몰아주기는 규제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법은 물론이고 상법 어디에도 대주주 일가에 지분을 매각하라고 강요할 규정은 없다. 이들이 법을 어겼으면 엄격히 책임을 물으면 된다. 김 위원장의 ‘가이드라인’은 즉각 시장에 혼란을 일으켰다. 일감 몰아주기 기업으로 꼽힌 삼성SDS의 주가는 급락했다. 투자자의 반발을 샀다.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8.23%) 해소 방안을 빨리 가져와야 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이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 국회에는 보험사의 총자산과 계열사 주식을 모두 시장가격으로 평가하고, 보험사는 총자산의 3%가 넘는 계열사 지분을 7년에 걸쳐 처분하라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최 위원장은 “법률이 개정될 때까지 금융회사가 개선 노력을 하지 않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의 기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현 보험업 감독규정은 보험사의 총자산은 현재의 시장가격으로 평가하되, 계열사 주식은 취득 당시 장부가격으로 평가하도록 예외 규정을 두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을 장부가격으로 계산하면 총자산의 3%를 넘지 않는다. 시장가격으로 평가하면 3%를 초과한다.

법이 개정되면 삼성생명은 20조 원어치의 삼성전자 지분을 팔아야 한다. 보험업 감독규정은 금융위원회 의결로 개정할 수 있다. 하지만 금융위는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국회가 판단할 문제라는 입장이다.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국회에 권한을 넘겼으면서 법 개정 이전에 해법을 가져오라는 가이드라인이 나왔다. 삼성생명의 총자산에서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14%나 된다. 다른 생명보험사의 이 비중은 평균 0.7%다. 주식 시장이 출렁이면 삼성생명은 위험을 그대로 떠안아야 한다. 삼성전자가 어려워지면 삼성생명이 받을 충격은 커진다. 이는 고객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삼성생명이 미리 지분을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는 논리가 부각된 이유다.

다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다. 정부는 법이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입법부를 설득해 법을 고치면 된다. 대기업 총수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20% 이상(비상장사) 또는 30% 이상(상장사)인 경우만 해당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 이 지분율을 낮춰 촘촘히 견제하면 된다. 보험업법도 국회에서 개정하도록 행정부의 역량을 집결하면 된다. 이후에 법을 어기면 엄격히 처벌하면 그만이다. 통치받는 사람이 아니라 통치하는 사람을 옥죄는 게 법치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법률이 정한 권한을 넘어서면 사회의 신뢰자본은 무너진다.

김종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