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최고' 부럽잖은 '2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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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OB 베어스(지금의 두산 베어스) 스카우트팀의 판단은 정확했다. OB는 연고지 서울의 최고 거포(배명고 김동주)를 1차 지명했다.

그리고 좌타자 유망주(신일고 김재현)가 LG와 계약하자 그 다음으로 유망한 대형 타자(동대문상고 심정수)를 확보했다. OB는 김동주와 심정수를 3~4년 뒤 손꼽히는 강타자로 키워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그들에게 OB 유니폼을 입히는 것이었다. 김동주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끝내 고려대를 택했다.

심정수는 OB를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았다. 부모의 동의가 필요한 나이였다. 심정수의 아버지는 아들을 한양대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는 "정수를 만나 자꾸 유혹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OB측에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청년'심정수는 프로에 대한 소신이 강했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OB는 심정수를 믿었다. 심정수에게 먼저 사인을 받고 보호자란은 공란으로 남겨 놓은 채 그 계약서를 다시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봐라, 이게 정수의 진심이다. 아들이 이렇게 간절히 원하지 않느냐"고 매달려 결국 사인을 받아냈다.

그렇게 어렵게 OB 유니폼을 입었지만 심정수의 프로 적응은 쉽지 않았다. 입단 첫해 그의 성적은 61타수 10안타. 타율 0.161이 전부였다. 그러나 심정수는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천재형이라기보다는 노력형이었다. 그래서 구단은 그를 믿고 기다렸다. 그는 분명 남보다 많이 노력했다.

95년, 김인식 감독을 만나면서 심정수는 활짝 피었다. 타율 0.282에 21개의 홈런. 홈런 4위였다. 당당히 한.일수퍼게임 대표가 됐다. 그러나 이때 심정수는 갑작스러운 스타덤에 우쭐했다. 그는 사생활을 다스리지 못했다. 2년의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러다가 고교 때부터 한발 앞서 있던 김동주가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뛰어든 98년, 그는 정신을 차렸다. 본래의 모습으로 성실하게, 그리고 소신있게 야구에 매달렸다. "야구에 미친 것 같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심정수는 이런 노력으로 김동주와 함께 가장 위협적인 국산(國産)오른손 타자가 됐다.

2001년 현대로 옮긴 심정수는 이승엽(삼성)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사상 가장 뜨거운 홈런레이스를 2년째 이어가고 있다. '국민타자'같은 화려한 수식어는 없지만 그는 분명 최고 타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우리는 2등을 쉽게 잊는다. 80년대 '천재타자'장효조의 그늘에 가렸던 김종모가 그랬고, 83년 장명부의 30승에 가렸던 '20승 투수'이상윤이 그랬다.

심정수는 꾸준히 지켜오던 시즌 타격 1위 자리를 최근 김동주에게 내줬다. 또 홈런.타점에서는 2년째 이승엽의 뒤에 서있다. 심정수가 또다시 2등을 하더라도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이른바 '천재'들을 따라잡은 그의 노력과 열정만큼은 가슴에 깊이 새겼으면 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신념과 확신, 그리고 열정과 진지함에서 훌륭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의 2등은 '최고'보다 더 아름다운 '최선'으로 얻어낸 것이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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