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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사업 뒤집고 '물갈이' 소문도…지방권력 접수 시작됐다

중앙일보

입력

미국에선 한때 ABC란 표현이 유행했다. 풀어쓰면 ‘Anything But Clinton’으로, ‘클린턴이 했던 걸 제외하면 뭐든지’란 의미다. 2001년 취임했던 조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설명하는 말이었다.

7월 2일 광역단체장 취임을 앞둔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6ㆍ13 지방선거에서 한국당 현역 단체장을 누르고 새로 지방권력을 잡은 더불어민주당 당선인들이 전임자의 정책을 뒤집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ABH(Anything But Hankook, 한국당이 아니면 뭐든지)라 할 만한 상황이다.

지방선거 후 인천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당선증을 받은 박남춘 인천시장 당선인 [연합뉴스]

지방선거 후 인천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당선증을 받은 박남춘 인천시장 당선인 [연합뉴스]

인천에선 박남춘 당선인의 인수위가 최근 “인천의 부채가 기존에 발표한 10조1000억원이 아니라, 15조원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금융기관 등에 갚아야할 돈은 10조613억원이지만, 2조2000억원에 이르는 인천경제자유구역 토지 비용 등 잠재 부채가 5조원가량 있다는 것이다. 유정복 시장과 박 당선인은 선거 기간 중에도 부채 감축 규모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4년 전 유 시장의 1호 공약이었던 인천발 KTX 개통 시점도 3년 늦춰질 거라고 밝혔다. 인수위 백수현 대변인은 “선거기간 중 2021년 개통으로 알려졌던 인천발 KTX가 2024년에나 개통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인천발 KTX가 반드시 지나야 하는 평택-오송 간 병목현상이 심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박 당선인 인수위가 갑질·적폐·무능 공무원의 도태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시청에선 유정복 시장이 임명한 주요 간부들이 대거 밀려날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인이 18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에서 열린 인수위원회 '새로운 경기위원회' 첫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인수위는 기획운영·기획재정·안전행정·경제환경·문화복지·농정건설·교육여성 등 7개 분과와 평화통일특구·새로운경기·교통대책·4차산업혁명·평화경제·평화안보 등 6개 특위를 구성해 도의 핵심 현안을 점검할 계획이다. 2018.6.18/뉴스1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인이 18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에서 열린 인수위원회 '새로운 경기위원회' 첫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인수위는 기획운영·기획재정·안전행정·경제환경·문화복지·농정건설·교육여성 등 7개 분과와 평화통일특구·새로운경기·교통대책·4차산업혁명·평화경제·평화안보 등 6개 특위를 구성해 도의 핵심 현안을 점검할 계획이다. 2018.6.18/뉴스1

경기도 상황도 비슷하다. 이재명 당선인은 남경필 지사가 추진하던 월드컵스포츠센터 위탁업체 선정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계약 기간이 4개월 남았는데, 3년간 위탁 운영할 업체를 급하게 선정하고 있다”는 이유다. 남 지사가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던 청년 연금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청년연금은 경기도의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청년이 10년간 매월 30만원씩 적립하면 도에서 같은 금액을 더해 최대 1억원의 목돈을 마련해준다는 내용으로 올해 시작된 남경필표 청년 정책이다. 이 당선인 측 관계자는 “남 지사가 추진하던 정책들을 전반적으로 리뷰하고 있는데, 청년 연금 같은 정책은 대폭 수정되거나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인천과 경기도는 광역의회도 민주당이 완벽히 장악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전임 단체장 색깔빼기가 가속화될 전망이다.

왼쪽부터 송철호 울산시장 당선인, 오거돈 부산시장 당선인, 김경수 경남지사 당선인. 더불어민주당 원내지도부와 세 당선인은 26일 울산에서 만나 현장 정책 간담회를 가졌다. 뉴스1

왼쪽부터 송철호 울산시장 당선인, 오거돈 부산시장 당선인, 김경수 경남지사 당선인. 더불어민주당 원내지도부와 세 당선인은 26일 울산에서 만나 현장 정책 간담회를 가졌다. 뉴스1

특히 1995년 지방자치제 도입 후 처음으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부산ㆍ울산ㆍ경남(PK)의 경우 변화의 폭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정책뿐 아니라 ‘사람 물갈이’가 대대적으로 이뤄질 것이란 예상이 유력하다.
실제 오거돈 부산시장 당선인은 경제부시장에 유재수(54) 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을 내정하면서 인적쇄신의 신호탄을 쏴 올렸다. 서병수 시장이 임명한 김기영(56) 현 경제부시장은 취임한지 6개월밖에 안됐지만 거취가 불투명해졌다.
송철호 울산시장 당선인은 “지역주의, 학연주의, 혈연주의는 공정한 사회를 가로막는 적폐”라며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인 ‘적폐 청산’ 시동을 걸 태세다. 김경수 경남지사 당선인도 ‘문재인 벤치마킹’을 시작했다. 문 대통령이 취임 초 만든 국민 정책 제안 프로그램 ‘광화문 1번가’를 그대로 본뜬 ‘경남 1번가’를 만든 게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PK로 묶인 이들 세 지역은 때로 같은 목소리를 내며 뭉치기로 했다. 특히 이들은 26일 민주당 원내대표단과 울산에서 ‘부·울·경 현장간담회’를 하면서 중앙 정부의 기존 정책을 뒤짚는 ‘동남권 신공항’ 재추진을 선언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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