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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31. 독일에서 프랑스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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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67년 동백림사건 때 공판 모습. 이 사건 직후 필자는 프랑스행을 택했다. [중앙포토]

서독 광원 생활은 당초 3년 계약이었다. 첫 계약이 끝나갈 무렵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 정부는 1967년 재독 작곡가 윤이상씨 등이 북한과 내통했다며 구속했고, 세상이 무척 시끄러웠다. 그 영향은 서독에도 미쳤다.

영관급 장교로 구성된 서독 한국대사관의 노무관들이 우리 광원 일행을 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내 경우 계약 갱신을 포기했던 것은 그런 분위기가 꺼림칙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구했던 마음 때문이다.

"까짓것 이 기회에 넓은 세상을 한번 실컷 구경이나 해봐?"

그런 엉뚱한 생각을 굴릴 무렵 동료들은 서독에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들과의 짝짓기로 부산했다. 짝짓기에 성공하면 그들은 대부분 캐나다.미국 이민을 선택했지만, 나는 중뿔나게 프랑스를 선택했다. 당시 프랑스는 지금과 또 달랐다. 유학생.동포가 통틀어 150명이던, 그야말로 낯선 만리타국이었다.

30대 초반인 나야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3년 동안 송금한 돈으로 서울의 어머니는 도곡동에 아파트 한 채를 장만했다고 들었다. 소풍을 가듯 도착한 파리에서 만난 첫 한국인은 유학 중이던 화가 석란희였다. 바로 친해진 그의 소개로 중국집 접시닦이로 취직했다.

파리 시내 차이나타운의 중국집 주인은 19세에 3.1운동에 참가한 뒤 유럽 망명을 선택했던 1세대 동포였다.

나는 알리앙스 프랑세스에 등록해 초급 불어를 공부했다. 오후 3시부터 식당이 쉬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 것이다. 나중 70년 9월 내가 귀국했을 때 별 우스운 소문이 귀에 들려왔다.

"그 무식한 배추가 학위를 받아왔다더라?"

"전공은 동물사회학이고, 소르본대에서 공부했대."

그럴싸했던 소문들은 내가 파리에서 불어 공부를 한답시고 들고 다니던 불어책 원서 몇 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파리에서 경남 마산 출신의 거물 조각가인 문신, 이희세(이응노 화백의 조카), 사회학 박사과정의 이유진 등을 알고 지냈다. 반정부 활동 때문에 한국 정보부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이유진은 몇 해 전 서울에서 뜨겁게 해후하기도 했다.

그때 문제의 술친구도 사귀었다. 김 아무개. 네 살 위라서 형님으로 모시던 그와는 매일같이 어울렸다. 그는 소르본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당시 동포 가운데 불어에 가장 능했고, 삐딱한 정치 성향을 갖고 있어서 세상을 아는 체하는 '구라꾼'인 나와는 죽이 척척 맞았다.

얌전한 성품의 그는 술 몇 잔을 걸치면 엉망이 됐다. 동포 음식점 주인을 보고 대뜸 "야, 당신 한국 정보부에 고자질하지? 대가로 얼마를 받아?"하며 엉뚱한 시비를 붙곤 했으니까. 알제리 사태를 전후한 당시 파리 분위기는 자유도시, 망명도시였고 그곳은 그에게 썩 어울리는 도시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김씨 때문에 파리 한복판에서 큰싸움에 휘말렸다. 얼마 전 귀띔했던 스페인계 조폭과의 싸움이다. 까딱 했으면 그때 나는 저 세상으로 갈 뻔했다. 겨우 이겼던 것은 운이 좋아서였을 뿐이다.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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