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또 지웠다 … 예쁘게 꾸민다고 그림인가

중앙일보

입력 2018.06.26 00:30

업데이트 2018.06.26 09:14

지면보기

종합 21면

오수환 화백은 이번 전시에서 2016년 이후 제작한 신작 30여 점을 선보인다. 감각적인 소통에 대한 바람을 담은 ‘대화’ 연작이다. ‘Dialogue’ 2016~2017, 2018. [사진 가나아트센터]

오수환 화백은 이번 전시에서 2016년 이후 제작한 신작 30여 점을 선보인다. 감각적인 소통에 대한 바람을 담은 ‘대화’ 연작이다. ‘Dialogue’ 2016~2017, 2018. [사진 가나아트센터]

추상화가 오수환(72) 화백은 하루 4시간씩 걷는다. 서울 방학동 자택에서 매일 2시간 거리를 걸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자리한 작업실을 찾는다. 집에 돌아올 때도 2시간을 다시 걷는다. 오 화백은 “내가 그렇게 미련하게 산다”며 웃었다.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인생이라는 게 그냥 시간을 보내는 거다. 꼭 의미를 가지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답했다.

‘추상화 40년’ 오수환 화백의 고백
대형작품 30점 모은 ‘대화’ 선보여
시처럼 음악처럼 약동하는 회화
예술에 특별한 방향 있을 수 있나
삶은 언젠가 자연에 돌아가는 것

그가 서울 가나아트센터 전시장에 ‘대화(Dialogue)’라는 제목 아래 자신의 추상화 30여 점을 풀어놓았다. 겹겹이 교차하는 강렬한 원색, 대담한 붓질로 채운 대형 화면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동적인 기운도 눈에 띄지만, 그의 그림은 어느새 운율이 살아 있는 시(詩)가 되어 있는 듯했다. “회화의 순수성을 음악적인 리듬, 색채의 리듬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감각이 중요하다”고 한 그의 말과 공명하는 작품들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40여년간 매달려온 화업에 대한 이야기 그 이상의 것으로 들렸다. 꾸미지 않고 긴장이 없는 화폭을 추구한다는 말은 ‘흐르는 듯이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전한다.

오수환 화백은 이번 전시에서 2016년 이후 제작한 신작 30여 점을 선보인다. 감각적인 소통에 대한 바람을 담은 ‘대화’ 연작이다. ‘Dialogue’ 2016~2017, 2018. [사진 가나아트센터]

오수환 화백은 이번 전시에서 2016년 이후 제작한 신작 30여 점을 선보인다. 감각적인 소통에 대한 바람을 담은 ‘대화’ 연작이다. ‘Dialogue’ 2016~2017, 2018. [사진 가나아트센터]

◆지우고 떠나기=세상만사가 그렇습니다. 숨겨진 것이 있으면 드러나는 것도 있고,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게 있으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요. 저는 특히 숨겨 놓는 것, 지워 없애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언젠가 떠나는 것,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갈 때 지우고 떠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작업은 한편으로는 지우는 작업이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동안 저는 그리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해 왔습니다.

◆무질서 속의 질서=제 작품엔 질서가 없어 보입니다.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꾸미거나 뜻을 더하지 않는 것, 즉 무위(無爲)를 표현하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균형,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접점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사실상 우리의 현실은 무질서합니다. 그리고 질서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이질적인 요소가 어울리고 범벅인 상태, 그 안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자연의 리듬=저는 화면을 대체로 빠른 붓질로 채웁니다. 제 작업은 순간적인 표현으로 이뤄져 있죠.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리듬과 색채를 화폭에 담고 싶었습니다. 화면이 자연은 아니지만, 그게 두 번째 자연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자연이야말로 모든 것의 고향이고, 자연이야말로 인류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수환.

오수환.

◆무의식과 감각의 가치=의식만으로는 인간을 다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붓질을 하는 등 여러 제스처로 무의식의 상태와 교감하려는 시도를 했죠. 현대 사회가 과학·이성 일변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감각’으로 견제하는 게 예술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의식, 무질서, 감각의 세계에서 자연성을 되찾는 게 중요합니다.

◆‘결말’은 없다=누군가는 제 그림이 계속 변화한 것을 보고 ‘이 작가가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구나’ 할 거예요. 그렇게 보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은 변화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화폭에 색채를 담기 시작한 것은 10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 전엔 20년간 흑백만으로 작업했죠. 이런 변화를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게 흐르는 과정이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결말’이나 ‘완성’이니 하는 말은 제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목적이 없어도 괜찮다=제가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유와 해방입니다. 회화적으로 순수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죠. 순수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제 작업은 이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그 대답입니다. 대중이 제 작품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면 제 작품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제가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작업은 목적이 없습니다.

◆황산곡,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말레비치=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문학과 철학책을 옆에 두고 지내왔습니다. 이백(701~762)과 소동파(1037~1101)와 황정견(1045~1105, 호는 山谷)의 시를 즐겨 읽었죠. 1980~1990년대에 황정견 시를 읽으면서 ‘곡신’ 시리즈를 작업했고,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를 읽으며 그 형식을 어떻게 내 작품에 구현할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의 추상미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에게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책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만납니다. 책이야말로 제가 작업을 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죠.

인터뷰 말미에서 그는 “제 머리맡엔 항상 고대 동굴 벽화 사진이 놓여 있다”며 “거기서 인간의 착한 심성을 본다”고 했다. 그가 루브르 박물관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을 찾아 드로잉을 하고, 손녀·손자의 그림을 수집해 보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경험은 갈수록 더 황폐해지고 있다”며 “솔직하고, 투명하고, 긴장이 없는 제 작품에서 관람객이 자유로움을 느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7월 15일까지.

관련기사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모비온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