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북방외교의 첫 결실|한-헝가리 상주대표부 설치의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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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나라가 13일 헝가리와 대사급에 준하는 상주대표부를 설치키로 합의함으로써 북방외교정책수행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는 길게보면 48년 정부수립이후, 짧게보면 73년「한국은 세계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6·23선언 이후 처음으로 이념과 체제가 다른 국가와 정부차원의 공식관계를 맺게된 것이기 때문이다.
양국의 교섭경위를 보면 이번의 경우가 여타 동구권국가는 물론 앞으로 소련·중국과의 관계개선에도 좋은 경험과 선례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양국은 지난해 초부터 본격적으로「이념의 벽」을 깨고 교류의 폭을 심화시켜 왔었다. 물론이때는 민간차원이었다. 경제분야를 위시해 문학·학술·언론·체육교류가 활발히 벌어졌었다.
그러다가 양국관계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된 것은 지난해 8월말에 있었던 무역사무소설치 합의였다.
이에 따라 87년12월 우리가 헝가리에, 금년 3월 헝가리가 서울에 각각 민간차원의 무역사무소를 설치했다.
이 같은 민간차원의 교류를 바탕으로 지난 7월초 박철언 대통령정책보좌관·민형기 외무부구주국장이 비밀리에 헝가리를 방문, 「그로스」당서기장 등 헝가리 요인들과 요담을 갖고 정부차원의 교섭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렇게되자 헝가리측에서도 정부요인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박·민팀이 다시 헝가리를 다녀오는 등 교섭이 급진전됐다. 헝가리는 정식수교를 결심했으나 북한의 존재가 걸려「상주대표부」형식을 택했다.
즉 엄격한 의미에서 외교관계수립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면서 사실상 기능면에서는 총영사차원을 넘는 대사급의 역할을 수행할수있게 하자는 의도다.
「대사」를 「대표」로 호칭할 뿐 양국대표부는▲파견국 국민보호▲경제·통상·문화·스포츠·과학기술 등 제분야에서의 관계증진▲영사업무 수행은 물론 접수국내에서 파견국을 공식대표하고 제반 교섭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이에 따라 관광 등을 위한 각종 비자발급은 제3국을 경유할 필요가 없고 교역에서도 직교역이 가능하게 될뿐더러 사고 발생시에는 정부간 직접교섭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게됐다.
그러면 예상보다 빨리 한·헝가리관계가 진척된 배경은 무엇이며 다른 공산권국과의 관계개선 전망은 어떤가.
우선 이 같은 단계에 온데는 공산권의 종주국인 소련의 변화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 85년3월「고르바초프」가 등장한 이후 소련이 개혁과 개방의 정책을 표방함에 따라 이 여파가 동구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르바초프」취임이후 동구권에서 벌어졌던 사태진전의 양상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고르바초프」는 86·87년에 체코·폴란드·루마니아를 순방하면서 경제개혁을 촉구했고 동독 「호네커」 서기장의 서독방문을 허용하기도 했다.
특히 88년초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했을때는 『모든 나라는 저마다 자국의 발전을 위해 스스로 노선을 택할 수 있다는「신 베오그라드선언」을 발표했다.
동구중 가장 서방과 가깝고 개방적인 헝가리가 가장 빨리 변화의 물결을 탔고 우리 정부가 이를 재빨리 포착했다.
대북한관계에서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모색해야할 우리로서는 헝가리의 변화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는 이를 성공시켰고 헝가리와의 상주대표부 설치합의는 북방외교의 첫 번째 가시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우리 주변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 일단 대 공산권 관계에서 교두보를 확보한 것은 다른 동구권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도 결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북한일색의 외교공관만 있는 동구권에 우리 공관이 설치되면 우리의 우월성이 곧 분명해지고 그것은 다른 동구국가들과의 유사한 관계증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아울러 그 같은 변화가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는데 큰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고 보고있다.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올림픽이후의 국제정세를 감안한다먼 북한이 사상적 동맹성만으로 동구국가의 대한접근을 막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안보·경제상황 등을 감안 할 때 이번 일로 우리가 너무 들떠서는 안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즉 헝가리를 비롯한 동구권, 더 나아가 소련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은 그들 내부의 필요성 때문이지 결코 한국의 북방정책을 돕고 북한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당국자는 『현재 공산권의 계획경제체체로는 자본주의사회를 따라갈 수 없다는 판단하에 공산권이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안보면에서의 힘의 균형, 경제면에서의 실리추구 등에 항상 긴장하며 상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게다가 헝가리 등 동구권은 기본적으로 소련이나 중국에 영향을 미칠만한 실체가 못되고 경제상황도 별로 좋지 못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당장 소련·중국에 대해서도 큰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일방적인 상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공산권으로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정부차원의 공시관계를 맺게된 것은 우리 외교사에 한 획을 긋는 의미는 있으나 향후 양국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게 국익차원에서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시작에 불과하므로 사전에 신중한 대비를 해야할 것 같다.<안희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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