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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그리고 DJP연합…한국정치 40년 풍미한 3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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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김종필

김종필(JP) 전 총리는 ‘3김(金) 시대’의 주연이자 ‘게임 체인저’였다.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하며 40여 년을 풍미했다. 서로의 정적이자 라이벌이었던 거물들의 판단은 시대의 흐름을 바꿨다. 신념과 애증이 교차하는 복잡미묘한 관계 속에서 한국 정치의 역사가 생산됐다. 충청의 맹주 JP는 영남·호남의 영도자였던 YS·DJ 사이에서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정적에서 조력자로, 새로운 정국의 설계자로 변신했다.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한 정치적 연대를 때로는 혁명처럼, 때로는 기적처럼 이뤄냈다. 수원대 총장을 지낸 이달순 교수는 자신의 저서 『현대 정치사와 김종필』에서 이렇게 적었다.  “국민은 그를 ‘영원한 2인자’로 명명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임기를 마쳤으면 ‘영원한’ 정치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은 1989년 1월년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연합뉴스]

사진은 1989년 1월년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연합뉴스]

 1990년 1월 22일 민주공화당 총재였던 JP는 노태우(민주정의당) 전 대통령, YS(통일민주당)와 함께 3당 통합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했다.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DJ는 “국민이 만들어 준 여소야대를 국민과 상의 없이 여대야소로 만드는 파렴치한 국민 배신행위”라고 비판했다. 1992년 대선에서 YS는 14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JP는 민자당 대표가 된다. DJ는 정계를 은퇴했다(이후 1995년 복귀해 대선 4수에 도전한다). 그러나 3당 합당 때의 의원내각제 추진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JP는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1997년 11월 3일엔 DJ의 국민회의와 JP의 자민련이 야권 후보 단일화 합의문 선언 및 서명식을 가졌다. 이른바 DJP 연합이다. 당시 DJ는 “우리는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JP는 “헌정 사상 최초로 야권 단일 후보가 탄생했고, 공동정부의 출범을 기다리고 있다”고 자평했다. DJ는 15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JP는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같은 날 레임덕 정부의 대통령 YS는 구속된 자신의 차남 현철씨가 법원으로부터 보석 결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3김이 걸어온 길은 역사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정적으로 시작된 인연은 진화를 거듭했다. 1961년 JP는 박정희 소장과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 당시 DJ는 강원도 인제 민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된 뒤 상경하고 있었다. 기차 속에서 맞은 쿠데타로 3일 만에 의원직을 잃었다. JP가 만든 중앙정보부는 1973년엔 DJ를 일본에서 납치하기도 한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JP는 이를 몰랐다고 하나 역사의 악연임은 분명하다.
 JP는 YS와 1962년 처음 만났다. YS를 공화당에 합류시키려고 “우리 혁명세력과 같이합시다”고 설득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당시 YS는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다.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하니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다”고 답했다고 JP는 회고했다. 1979년 YS의 국회의원 제명안이 국회에 올라왔을 때 당시 공화당 상임고문이었던 JP는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10·26 때엔 청와대 빈소에서 상주와 문상객으로 만나 두 손을 꼭 잡았다고 한다. JP는 2015년 YS 서거 뒤 중앙일보에 기고한 특별회고록에서 “바깥 세상에서 보면 나와 YS가 상호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봤겠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동년배의 우정 같은 걸 교환했다”고 적었다. 그 글에서 JP는 3김의 정치를 이렇게 회고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이제 YS마저 유명을 달리했으니 나는 세상이 평하는 소위 3김(金)씨의 마지막 생존자가 됐다. 조물주가 나를 남겨놓은 이유는 마무리를 잘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 마무리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오호(嗚呼)라, 과연 이것이 나 자신이 걸어야 했던 길이냐’는 자탄(自嘆)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래도 미숙하나마 이것으로 만족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김승현 기자 s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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