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불법감청 공격수' 정형근, 국정원과 빅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국가정보원 주도로 추진되는 휴대폰-휴대폰 간의 감청 허용 방안에 대해 여야 의원의 입장이 뒤바뀌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첨단 통신이 발달하는 국제화 시대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 열린우리당 쪽은 '국정원 개혁을 먼저 하라'며 부정적 자세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일까?

국가정보원은 최근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 가운데 '전기통신사업자의 협조 의무'(제15조 2항)를 강화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그중에는 통신업체가 수사기관에 대해 ^감청 장비.시설.기술 제공 의무 ^통신 장비.시설.기술 개발시 감청 가능한 기준 채택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 의무 등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한 마디로 수사기관이 휴대폰.인터넷폰(IP) 등을 감청할 때, 통신업체가 협조해야 하고 이를 어기면 처벌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국정원의 이런 방안이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의 주도로 마련된 통비법 개정안에 녹아있다는 점이다. 정 의원이 제출한 법 개정안은 지난 2월 국회 법사위에 상정돼 24일부터 본격 심의된다. 알다시피 공안검사 출신인 정 의원은 그동안 국정원의 불법 도.감청에 대해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해온 3선 의원이다. 요즘도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수시로 바꾸고 보좌진에게까지 알려주지 않을 만큼 불법 도.감청에 극도로 민감하다.

그렇다면 정 의원의 변심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정 의원이 25명의 동료 의원과 함께 발의한 자신의 법 개정안에 숨어있다. 그 속에는 수사기관의 감청 행위를 대폭 제한하고 국회의 감시.통제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이 들어있다. 예컨대 국회 안에 수사기관 감청을 견제.감시하는 '감독특별위'를 설치하는 방안도 있다. 국회가 수사기관의 감청 실태를 꽉 움켜쥐고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다.

그래서 정치권에선 "국정원과 정형근 의원이 빅딜을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국정원이 정 의원의 법 개정안 중 일부를 받아들이는 대신 정 의원이 국정원의 휴대폰 합법 감청 추진 방안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남북한 대치 상황, 그리고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이 75만 명에 이른 현실에서 더 이상 국내의 '거동 수상자'들을 '감시 사각 지대'에 방치할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한다.

여권 관계자는 "수사기관이 휴대폰 감청 자체를 하지 못한다는 약점 때문에 요즘 한국에 온 각국의 스파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의식한 듯 정 의원 측은 "국가안보와 범죄 수사에 한해"라는 단서를 달아 휴대폰 감청 허용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혔다. 불법 도.감청에 관해 전문가 수준에 오른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도 비슷하다. 권 의원은 "첨단 통신이 빠르게 발전하는 현실에서 국가안보.테러.산업스파이.흉악범죄 등을 막으려면 국정원.검찰이 이들의 정보망에 들어갈 '마스터 키'를 갖고 있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물론 "휴대폰 감청을 남용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해선 절대로 안된다"는 단서를 달아서였다.

열린우리당도 휴대폰 감청 허용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강조점이 다르다. 국민의견 수렴과 국정원 개혁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4선 의원으로 국회 정보위 소속인 장영달 의원은 "불법 도.감청 예방책과 국민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교관 출신인 정의용 의원은 "선진국들이 휴대폰 감청을 허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과거 악용사례가 많았고 국민 불신도 여전하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두 의원은 '국정원 개혁'을 먼저 하라고 주문했다.

국정원.검찰 등 수사기관은 현행 법상 유선전화, 휴대폰, 무선호출기, 인터넷.PC통신 등을 감청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통신부에 따르면 휴대폰 감청 사례는 대부분 통화 내역.문자메시지에 그친다는 설명이다. 지난해에는 전년보다 21.7% 늘어난 24만4976건으로 집계됐다. 그럼에도 휴대폰 감청 기술은 속속 확보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법만 허용하면 이동전화 기지국과 이동 감청시스템을 활용해 얼마든지 휴대폰 감청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첨단 통신이란= 휴대폰과 인터넷을 매개로 이뤄지는 각종 통신 수단을 말한다. 국제 전화를 할 때 많이 쓰는 인터넷 폰(IP)은 미국에서도 2004년 감청 기술 표준이 발표될 만큼 새로운 통신 수단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인터넷 상에서 특정의 가입자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형 사용자 그룹(CUG)'서비스,'음성 우편 시스템'(컴퓨터를 통해 음성정보를 미리 저장했다가 수신자에게 자동으로 전달하는 통신 시스템)등도 첨단통신으로 꼽힌다. 미국은 현재 차세대 통신망에 대한 감청 기술을 개발 중이다.

이양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