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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도시 빈 매료시킨 ‘판소리 오페라’…"소리가 가슴에 꽂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6일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을 마친 배우들에게 기립 박수를 하는 오스트리아 빈 관객들. [사진 국립극장]

16일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을 마친 배우들에게 기립 박수를 하는 오스트리아 빈 관객들. [사진 국립극장]

한국의 창극 가락이 음악 도시 오스트리아 빈 관객들의 마음을 훔쳤다.
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이 16∼18일 빈 도심의 오페라 극장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공연됐다. 올해로 67주년을 맞은 빈 페스티벌의 폐막작으로 선정돼,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 요한 스트라우스 오페레타 ‘박쥐’ 등이 초연됐던 유서 깊은 극장 무대에 오른 것이다. 이 공연을 초청한 로베크 모리츠 빈 페스티벌 큐레이터는 16일 첫 공연에 앞서 기자들을 만나 “ ‘트로이의 여인들’은 2016년 초연 때부터 국제 공연계에서 소문이 나 있었다. 작품을 영상으로 처음 접했는데, 판소리라는 전통음악과 새롭게 창작된 음악의 혼성이 강렬하게 다가왔다”며 “새로운 형식의 오페라를 공연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원작(기원전 415)을 각색해 만든 ‘트로이의 여인들’은 그리스ㆍ스파르타 연합군과의 전쟁에게 패망한 트로이에서 여인들이 겪는 비극적 운명을 담아냈다. 모리츠 큐레이터에 따르면 “서구 관객들에게 아주 친근한 이야기”다.

지난 2일부터 영국ㆍ네덜란드ㆍ오스트리아에서 유럽 투어 공연을 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사진 국립극장]

지난 2일부터 영국ㆍ네덜란드ㆍ오스트리아에서 유럽 투어 공연을 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사진 국립극장]

익숙한 이야기를 새로운 소리로 만난 관객들은 공연 시작부터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창(唱) 특유의 거친 발성법에 생소함을 느낀 것도 잠시, 심연에서부터 울리는 소리의 힘에 빠져들었다. 남편ㆍ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잃게 된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큐바의 절규 앞에서 관객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고, 트로이 전쟁을 촉발한 절세 미녀 헬레네 역으로 남성 배우 김준수가 등장할 때는 탄성을 터뜨렸다. 16일 첫 공연이 끝난 뒤 800석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은 박수와 기립 환호로 감동을 표현했다. 연출을 맡은 옹켕센은 “창극 배우들의 에너지가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예술의 감동에는 국경이 없다. 한국 음악과 고대 그리스 비극을 합치면 뭔가 나오겠다고 생각했던 내 판단이 맞았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관객들 역시 소리를 통한 강렬한 감정이입에 놀라워했다.  엘리자벳 푸르나키(56ㆍ교사)는 “배우들의 소리가 직선으로 날아와 내 가슴에 정확하게 꽂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빈 페스티벌에서 봤던 여러 작품 중 최고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헝가리에서 온 수잔 페게시(63ㆍ가구 디자이너)는 “공연 중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는데 옆을 보니 옆 관객도 울고 있더라”면서 “헝가리 사람들도 좋아할 작품이다. 부다페스트에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열 살 때 베트남에서 오스트리아로 이민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히엔 호왕(48)은 “굉장한 감성의 소용돌이였다. 딸이 K팝을 좋아하는데, 이 공연을 보고나니 나도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공영방송 ORF는 17일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리뷰 기사에서  “한국의 오페라인 창극과 그리스의 비극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자막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고 평했다.

17일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을 마친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사진 국립극장]

17일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을 마친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사진 국립극장]

17일 공연을 마친 뒤에는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늦은 밤 극장 지하 강의실로 장소를 옮겨 진행한 행사였는데도 150여 명의 관객이 참석했다. 관객들의 질문은 창극의 뿌리인 판소리에 집중됐다. ‘트로이의 여인들’ 제작ㆍ출연진에게 “판소리를 작곡한 사람이 따로 있나” “판소리는 어떻게 배우나” “판소리에도 코러스가 있나”  등을 물었고, 최근 북미정상회담 등을 의식한 듯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이 민감한데 이 작품에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하기도 했다.
빈 공연에 앞서 국립창극단은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도 ‘트로이의 여인들’ 을 무대에 올려 전석 매진과 기립 박수를 이끌어냈다. 지난 2일과 3일에는 런던국제연극제 개막작으로 초청받아 런던 사우스뱅크센터 퀸엘리자베스홀에서 공연했고, 8∼10일에는 홀란드 페스티벌 초청으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컨템퍼러리 콘서트홀 뮈지크헤바우 무대에 올랐다. 네덜란드 공연예술 전문지 ‘테아터크란트(Theaterkrant)’는 9일자 리뷰에서 ‘트로이의 여인들’에 최고 평점인 별 다섯 개를 주며, 김금미ㆍ김준수 등 배우들의 연기력을 극찬했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기획 단계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작품이다. 2015년 당시 싱가포르예술축제 예술감독이었던 옹켕센에게 연출을 맡겼고, 2016년 한국에서 초연한 뒤 2017년 싱가포르에서 공연했다. 이 작품이 국제 무대에서 주목을 받게 된 데는 옹켕센의 명성과 인맥이 큰 몫을 했다. 이번 유럽 투어 공연 중에도 해외 극장ㆍ축제들의 문의가 이어졌다. 국립창극단 측은 “미국 뉴욕 워커아트센터, 캐나다 푸쉬 페스티벌, 칠레 산티아고 아 밀 축제,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 호주 맬버른아트센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국제예술제 등에서도 공연 초청에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다.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우리만 즐기던 창극을 세계 음악의 중심지로 들고와 공연하게 된 것이 꿈만 같다. 창극은 이제 시작이다. 그리스 비극뿐 아니라 남과 북의 이야기, 한국 아줌마의 강인함 등을 집어넣어 세계 무대에서 사랑받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빈(오스트리아)=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유럽 공연 #런던ㆍ암스테르담 이어 빈서도 호평 #싱가포르 옹켕센 감독이 연출 #한국 예술의 세계진출 새 장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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