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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선과 프랑스 세잔의 공통점 '발로 뛰는 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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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민의 탈출, 미술 왕초보(6)

조선 시대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1751). [중앙포토]

조선 시대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1751). [중앙포토]

조선 시대 겸재 정선(1676∼1759년)의 ‘인왕제색도(1751년)’는 인왕산에 비가 그쳤다는 뜻을 가진 제목이다. 종로 효자동에 살았던 정선은 두 개의 시점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가운데 웅장한 산세는 올려다본 시점이다. 이 시점으로는 오른쪽 집안이 보일 수 없다. 내려다본 시점으로만 가능하다. 이처럼 여러 시점이 하나의 그림에 있을 때는 어딘가 낯설게 느껴진다.

이런 낯선 그림이 또 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은 사람의 앞모습 옆모습을 합쳐 놓아 놀라움을 준다. 그의 입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아름답다기보다는 놀랍다. 이는 현대미술의 특징이다.

피카소, 베레모와 격자 무늬 옷을 입은 여인(1937). [사진 송민]

피카소, 베레모와 격자 무늬 옷을 입은 여인(1937). [사진 송민]

우리는 입체에 대해 오랜 시간 굳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과 부딪쳐서 만들어진 놀라움과 낯섦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3D 영화를 보고 나오면 본다는 것의 원리에 신기함과 의문을 품게 된다. 카메라와 다르게 우리의 눈은 한 장면을 인식하기 위해 이리저리 굴려서 본다. 여러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시점에 의문을 품고 피카소의 작품에 영향을 준 이가 있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 화가 폴 세잔(1839~1906년)이다. 세잔은 어려서부터 원근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았다. 원근법은 물체가 멀어질수록 작아지고 마침내 점이 되어 소실된다는 원리다. 이것은 평면에 입체를 그려야 하는 건축설계도에서 시작했다. 카메라처럼 하나의 시점으로 바라본 거다. 원근법은 1400년대 르네상스 시대부터 회화에 적용된다.

500년 원근법을 파괴한 세잔

원근법은 자유로운 영혼인 고흐도 꼼짝 못 하게 만든 고전 미술 기법의 대단한 원칙이었다. 고흐는 원근법에 맞게 그리는 것이 어려워 원근 틀을 사용했다. 고전 미술의 전통대로 애쓴 것이다. 이렇게 이어온 500년의 큰 물줄기에 덤빈 불굴의 사나이가 세잔이다. 세잔은 도전을 위해 고향의 생 빅투아르산을 87점 그렸다. 그림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화구를 이리저리 옮기기를 수백 번 했다. 왜 이런 고생을 했을까?

고흐가 사용했던 원근 틀을 그려서 동생 테오에게 편지함(1882). [사진 송민]

고흐가 사용했던 원근 틀을 그려서 동생 테오에게 편지함(1882). [사진 송민]

물속에 젓가락을 넣으면 휘어져 보인다. 세잔 이전의 고전 시대는 눈으로 경험한 것을 믿을 수 없어 합리론이 영향을 주던 시대다. 1839년 사진기의 대중화로 드가 등 많은 화가는 사진을 보고 그렸다. 원근법에 맞게 그리기 좋아서다. 그만큼 원근법의 지배는 뿌리가 깊었다.

세월이 흘러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또한 눈으로 보고 듣고 만지는 경험으로 실제 증명해야 한다는 경험론 실증주의 시대로 바뀌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눈으로 보는 대로 햇빛의 변화를 그림에 그렸다. 이에 따라 배경과 형체가 구분이 안 되거나 형체가 평면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산이 평평하게 그려진 것이다. 그래서 사라진 산의 형체를 표현할 길을 고민한다.

모네, 지베르니의 양귀비 들판(1887). 세잔은 이 그림을 보고 산이 평면으로 나타나는것에 대해 고민한다. [사진 송민]

모네, 지베르니의 양귀비 들판(1887). 세잔은 이 그림을 보고 산이 평면으로 나타나는것에 대해 고민한다. [사진 송민]

여러 방향으로 바라본 입체의 여러 단면을 한 화면 속에 넣는 시도를 해본다. 세잔은 산을 여러 도형으로 그려본다. 산의 형체가 원뿔·구·원기둥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피카소처럼 대담하지는 않아 조금씩 살짝 시도한다. 원근법을 벗어나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결과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결과다.

폴 세잔, 생 빅투아르산(1895). [사진 송민]

폴 세잔, 생 빅투아르산(1895). [사진 송민]

생빅투아르산의 실제 사진. 왼쪽이 멀리서 본 산이고, 오른쪽이 가까이서 본 산이다. 세잔의 생빅투아르산 그림은 왼쪽의 사진처럼 멀리서 본 산이나, 오른쪽 사진처럼 가까운 시점 두 가지로 그렸다. [사진 송민]

생빅투아르산의 실제 사진. 왼쪽이 멀리서 본 산이고, 오른쪽이 가까이서 본 산이다. 세잔의 생빅투아르산 그림은 왼쪽의 사진처럼 멀리서 본 산이나, 오른쪽 사진처럼 가까운 시점 두 가지로 그렸다. [사진 송민]

정리하면 이렇다. 고전 시대의 모나리자의 배경을 보자. 산은 이런 모습이라고 이성으로 정리해둔 것을 그렸다. 빛 아래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과 달라도 말이다. 그 대신 형체는 뚜렷했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시작인 인상주의에선 이성보다 눈으로 실제 증명한 것을 그림에 그린 것이다. 이 둘 사이에서 고민한 세잔이 눈앞에 선하다. 세잔의 그림들은 오늘날에는 익숙하니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고전 미술에 익숙한 피카소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모나리자. [중앙포토]

모나리자. [중앙포토]

관념 산수화를 깨부순 정선

재미있는 사실은 세잔이 조선 시대 화가 정선을 알았다면 동지를 만난 듯 감탄했을 거란 사실이다. 둘의 공통점은 평생 20년 가까이 산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그 둘은 말년에 무언가 깨달은 듯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정선은 한국의 고전 미술인 관념 산수화를 400년 만에 벗어난다. 당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가 인정받던 시대였다. 도원은 이상향 별천지를 뜻한다. 이는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상상해서 그린 관념 산수화다.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 [중앙포토]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 [중앙포토]

정선은 관념 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을 발로 밟고 눈으로 보고 산수화를 그렸다. 커다란 변화였다. 마치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 아래로 나아간 것과 같다.

정선은 불교의 성지로 여겨지는 금강산도를 20년간 그려본다. 이 그림은 중국에 가져가면 아주 비싸게 받아 정선의 집 앞엔 금강산도를 사려는 이가 늘 줄을 섰다 한다. 상상이 아닌 실재의 산이지만 여전히 종교에서 중요시하는 이상향과 연결된 산만을 그렸다. 늘 아침마다 맞이하는 앞산 인왕산은 그릴 생각을 못 했다.

그러던 1751년 정선의 나이 76세가 되었다. 세잔처럼 산을 20년 가까이 그리던 어느 날 늘 바라보던 동네 산인 인왕산을 그린다. 세잔 옆에는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있었고 정선에겐 시인 이병연이 있었다.

인왕산. [사진 송민]

인왕산. [사진 송민]

종로 효자동의 한 마을에 살던 오랜 친구인 이병연이 아주 아팠다. 정선의 그림에 시를 써넣어 주며 정선을 빛나도록 후원을 했던 친구다. 인왕제색도는 그를 위해 그린 것이다. 친구의 집만을 강조하기 위해 산 아래 여러 마을을 구름으로 가려 단순하게 만들었을 거라 생각된다.

그의 마음에는 친구의 집을 내려다본 장면도 필요하고, 인왕산을 힘차게 그려 넣어 이 산처럼 어서 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시점으로 그렸다. 물론 여러 시점으로 그리는 것은 중국이나 조선이나 동양화의 오랜 흐름이었다.

정선은 실제의 모습을 화가의 생각으로 다시 재해석해 똑같이 그리지 않고 바꾸어 그린 것이다. 이렇게 조선 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예술형식을 ‘진경산수화’라 부른다. 종교의 이상향에서 현실의 산으로, 현실의 산 중에서도 일상적인 산으로 변화한 것은 세잔의 원근법 파괴만큼 큰 역사였다.

조선의 정선과 프랑스의 세잔의 공통점은 실학사상과 실증주의가 연결되는 이념에서 출발한다. 실재와 현실을 중요시하는 시대였다. 고전 미술의 특징처럼 고정관념 속 아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 실제로 검증하고 발로 뛰는 그림이었다. 그 결과가 빛 아래에서의 생빅트와르산과 빛 아래에서의 인왕산이었다.

정선과 세잔, 동네 산을 여러 시점에서 그려

20년을 바친 그 둘의 산은 동네 산이었다. 그리고 정선과 세잔은 여러 시점으로 그리는 공통점에서 만났다. 이것은 500년간 이어온 원근법이 지배한 고전미술과 이별한 세잔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관념 산수화에서 조선 이전의 고전 미술과 작별한 겸재 정선의 힘찬 출발이었다. 인상주의가 현대미술의 씨앗이듯 조선 시대는 현대미술의 씨앗인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있었다.

송민 갤러리32 대표 gallery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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