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盧정부 '희망의 싹' 보여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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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추석 연휴 동안 가장 좋았던 것은 신문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물나는 정치인들의 싸움을 안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맘이 편해질 줄 몰랐다. 나아가 언론의 개칠 없이 민심만으로 정치인들의 평가가 이뤄지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특히 이번에는 오래된 생선보다는 때깔이 새로운 참여정부 사람들이 도마에 자주 올랐을 것이다. 당연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언급이 많았을 것이고 칭찬만 나왔을 것 같지는 않다. 공식 여론조사에서 하향 추세를 보이던 그의 인기가 사랑방 모임이라고 뒤집힐 리 없다.

그러나 盧대통령의 인기 하락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역대 어느 지도자보다 이념 색깔이 선명하고 개혁 성향이 강한 그가 적 없이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잠재적인 지지자들조차 멀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상황이 나아지면 돌아올 사람들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그럴 날이 임기 전에 온다는 보장이 있느냐는 것이다.

제대로 개혁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인기가 일시적으로 떨어지는 것과 개혁은커녕 현상유지도 못할 것 같다는 의구심의 결과로 정부의 신뢰가 하락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의 인기 부침은 정권 차원의 문제지만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그의 신뢰가 추락하는 것은 나라 존망의 문제다.

어떤 해석이 맞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집권 6개월을 갓 넘긴 시점에서 이런 문제가 공공연한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민심이 돌아섰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흔들린다는 데 대해 이의를 달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참여정부가 승부를 거는 정책은 대부분 저항이 예상되고 그만큼 정당성의 확보가 중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군사정부 잔재 청산, 경제위기 극복과 같이 개혁의 명분이 뚜렷했던 이전의 민간정부와는 달리 참여정부는 기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더구나 소수정권으로 출발한 데다 취약해진 경제와 개혁 피로증까지 상속받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힘부터 길렀어야 했다. 야심찬 국정과제를 내세우기에 앞서 개혁의 정당성과 정책의 신뢰도를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경제를 살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경제 안정이 곧 개혁의 정당성인데도 '경제체질을 강화하며 단기부양은 안한다'는 식의 내용 없는 주장을 반복하고 '동북아 경제 중심'과 같은 멀리 있는 별 따기에 집착했다.

정책의 리더십이 없다보니 일관성 없는 정책 발표가 잦았고 쉽게 풀 일도 어렵게 몰고간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처음부터 차분하게 경제에 집중했다면 경제 자체도 더 나아졌을 것이고 개혁 과제들도 훨씬 더 힘을 받았을 것이다.

최근에는 집권층이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 같아 다행이지만 얼마나 진지하게 변했는지 알기 어렵다.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고, 설득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힘을 아껴도 힘든 판인데 불필요한 일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역시 가시지 않는다.

연휴에서 돌아온 첫날, 태풍이 민심이라 여기고 새롭게 시작하길 기대한다. 거두절미하고 행자부 장관의 사표부터 받아야 한다. 이겨도 지는 싸움은 빨리 그만두는 것이 좋다. 때로는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푸는 것이다. 부동산 투기 잡는다고 신도시에 학원단지 세우겠다는 정책을 세운 사람을 질책해야 한다.

그냥 놔두면 정권의 무능을 자인하는 것이다. 큰 것 놔두고 지엽적인 문제만 꼬집는다고 불평하는 참모가 있으면 이 사람 역시 멀리해야 한다. 아무리 작아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혹여 경제를 볼모로 이득을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의석 몇개 더 얻는 것보다 경제를 제대로 챙겨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것이 개혁의 정당성을 쌓는 지름길이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그 한계부터 깨달아야 한다. 서두르면 실패를 재촉할 뿐이다. 개혁은 또한 외롭다. 그래서 동지가 필요하다. 의사당에서 치고 받는 사람들이 그들이라면 국민은 더욱 외로워질 것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