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연, 내버려둬도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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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학의 본산이라고 일컬어 온 정신문화연구원이 깊은 수렁에 빠진 채 6개월 동안 허우적거리고 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문교 당국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문홍주 원장이 사표를 제출한지 한달 반이 지났고, 정문연 개편 안이 중앙교육심의 회 심의를 거친지도 두 달 반이 지났지만 아직껏 정 문 연은 무주공산으로 개편 방향조차 가름을 못하고 있다.
연구원들마저 연구원개편을 바라는 서명 파와 비 서명 파로 갈라섰고, 사무직 요원들도 노조와 비 노조로 나뉘어 서로를 경원하는 풍토가 되었다. 그야말로 무정부상태의 연구원은 석 달째 이 모양이다. 더구나 주무당국마저 수수방관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태의 발단은 지난 3월 정문연이 한국학 연구의 본래 목적을 뒷전으로 하고 국민정신순화교육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안팎의 여론에 밀려 문교부가 대통령업무보고서에서 두 달 이내 개편 안을 작성 보고하겠다고 밝힌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뤄졌다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차례의 세미나만 거듭되고 중교심에서 손질을 했지만 그 개편내용은 연구원 내부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점만 노출시키게 되었다. 비난의 대상이었던 국민정신 연찬 부는 연찬 실로 기구 축소하는데 그치고 엉뚱하게도 부속대학원의 학생 수를 절반으로 줄이면서 전체 예산을 삭감하는 방향으로 개편 안은 이뤄졌다.
급기야 개원10주년을 맞는 날(6월30일), 박사과정 협의회와 노조원1백여 명은 현 집행부의 퇴진과 연구원의 자율적 개편을 요구하며 기념식장을 차지해 버리자 기념식에 참석하러 온 외국학자와 내빈들은 뿔뿔이 헤어지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는 다른 기관도 아니고 학술기관이 이런 추태를 부리게 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연간 50억 원 예산을 집행하는 한국최대의 국가연구기관을 정부가 아무런 방책도 없이 6개월씩이나 방치해도 되는가를 따지려 하는 것이다.
그 동안 학계에서 논의된 정문연의 기본방향은 ①한국문화중심의 인문·사회과학 연구기관이어야 하고 ②관 주도적 연 찬을 지양, 순수한 학술연구를 통한 거시적 종합적 학술 연찬 이어야 하며 ③한국학 관계 전문인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원은 그대로 존속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애당초 정문연이 발족할 당시부터 유신정권의 어용기관이라는 빈축도 있었지만, 정문연 초기의 연구성과는 높은 수준의 실적을 쌓아올렸다는 평가를 받을 만 했다. 전국구비문학대계, 전국방언조사, 한국사상사대계 등은 정문연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업적으로 꼽힐 것이다.
이제 사태수습의 길은 정문연의 기본방향에 적합한 인물, 한국학을 넓고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인물로 원장을 발탁하는 것이 급선무다. 나머지 지엽말단은 원장의 주재로 연구원내의 의견을 고루 수렴해서 자율적으로 원만히 해결하면 저절로 풀려 나갈 것이다. 작은 일을 크게 벌여 놓고는 남의 집 불 구경하듯 사태를 어렵게 만드는 우를 되풀이하지 말기를 문교당국에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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