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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스타일] 판타스틱~ 원더풀~ 앙드레 김은 살아 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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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고 앙드레 김의 패션쇼에서 빠질 수 없는 무대가 바로 7겹의 코트 퍼포먼스다. 시스루 소재의 형형색색 코트를 하나씩 벗어던지는 과정을 통해 한과 슬픔을 해탈해나가는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했다.

고 앙드레 김의 패션쇼에서 빠질 수 없는 무대가 바로 7겹의 코트 퍼포먼스다. 시스루 소재의 형형색색 코트를 하나씩 벗어던지는 과정을 통해 한과 슬픔을 해탈해나가는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했다.

한국 패션사의 전설 ‘앙드레 김’이 돌아왔다. 지난 5월 30일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몰에서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추모 패션쇼가 열렸다. 2010년 대장암으로 75세의 나이에 작고한 지 8년 만이다.

타계 8주기 맞아 추모 패션쇼 #금빛 자수 드레스 등 화려한 재연 #‘한국적 콘텐트’ 평생 노력 되새겨 #“패션과 그림 접목 서구보다 앞서” #민간외교관 왕성한 활동도 조명

“의상에는 꿈과 환상이 담겨져야 한다.”

생전에 늘 주장했던 것처럼 그의 무대는 여전히 ‘판타스틱’했다. 과장된 실루엣, 금색 자수로 휘감은 총천연색 드레스, 인형의 머리처럼 한 올 한 올 동그랗게 말아 올린 헤어스타일, 하늘로 날아오를 듯 두 팔을 사선으로 펼쳐 옷을 표현하는 모델들, 장중한 음악, 웨딩드레스를 입은 남녀 모델이 머리를 맞대는 피날레 무대까지.

쇼는 고인이 늘 고집했던 ‘앙드레 김’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생전에 고인과 함께 작업했던 스태프들이 재능기부 형식으로 마련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의 모든 쇼를 연출했던 모델센터 도신우 회장이 연출을, 박영선·이종희·박순희·김태연 등의 시니어 모델들이 무대를, 모든 쇼의 헤어·메이크업을 담당했던 작은차이 현실고가 모델들을 단장했다. 쇼를 기획하고 주최한 건 수퍼모델들의 모임인 ‘아름회’였다. 김효진 회장은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이 스태프들이 현업에 있는 지금이 타이밍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아름회 회원들은 이날 무대에 서는 한편, 현장의 모든 진행까지 도맡았다.

신랑신부가 머리를 맞대는 포즈는 앙드레 김 쇼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신랑신부가 머리를 맞대는 포즈는 앙드레 김 쇼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후원은 유니셰프가 담당했다. 앙드레 김은 생전에 불우아동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 94년부터 별세 전까지 15회의 자선패션쇼를 통해 10억원 이상의 기금을 유니셰프한국위원회에 전달했다. 그는 1억원 이상 기부한 이들의 모임인 ‘유니셰프 아너스 클럽’의 세 번째 회원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앙드레 김 패션쇼는 고인에 대한 여러 가지 면모를 새삼 복기해보는 계기가 됐다. 첫째, 그는 한국적인 콘텐트를 사랑했던 디자이너였다. ‘드레스’라는 서양의상이 중심이라 화려한 ‘공주옷’ 정도로만 여겨졌지만, 그의 드레스 자락마다 자리 잡은 금색의 문양들은 당초문·용·봉황·십장생·매화도·초충도 등 분명한 한국의 콘텐트였다. 2015년 한불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파리 장식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패션 디자이너 전시를 기획했던 서영희 스타일리스트는 “한국의 오방색을 소개하는 컨셉트였는데 ‘금색’ 섹션에서 길이 막혔다”며 “그때 자연스레 떠오른 게 앙드레 김 선생의 옷이었다”고 말했다. 서영희 스타일리스트는 왕비의 대례복처럼 금빛 자수로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수놓은 앙드레 김의 옷들로 전시장 한쪽을 채워 “누구도 생각지 못한 아름다운 기획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추모 쇼를 지켜본 이상봉 패션디자이너는 앙드레 김의 한국적인 콘텐트로 ‘황후의 비밀스러운 눈물’ 퍼포먼스를 꼽았다. 7가지 색깔의 시스루 의상을 겹쳐 입은 모델이 하나씩 코트를 벗으며 다양한 컬러와 문양의 신비로움을 보여주는 무대였다. 이 디자이너는 “궁중 여인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모를 한을 한 겹씩 털어버리는 한국적 해탈의 정신을 보여준 무대”라고 말했다.

추모 패션쇼의 첫 번째 무대를 장식한 낭만적인 드레스들.

추모 패션쇼의 첫 번째 무대를 장식한 낭만적인 드레스들.

두 번째, 앙드레 김은 앞서가는 디자이너였다. ‘문화 콘텐트’라는 말 자체가 전무했던 60년대부터 그는 패션 외교를 이끌었다. 62년 한국의 1호 남성 디자이너로 데뷔한 이듬해 그는 파리 에펠탑 앞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73세까지 총 130회의 패션쇼를 열었는데 그 중 40회가 외국 무대였다. 바르셀로나, 애틀란타, 시드니, 울란바토르 등. 세계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와 피라미드 스핑크스 앞에서도 그의 쇼는 펼쳐졌다. 특히 외국에서 여는 패션쇼는 모든 경비를 주최자 혹은 초청자가 100% 지원한다는 조건에서만 응했던 걸로 유명하다. 그의 자서전 『앙드레 김 마이 판타지』에선 그 이유를 “문화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적었다.

이번 쇼를 지켜본 장광효 디자이너는 “외국대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선생에게 꼭 감사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한국인 특유의 정성으로 민간 외교를 실천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앙드레 김은 ‘한류’를 가장 먼저 실천한 문화인이었다.

2000년대 초 앙드레 김이 집중했던 명화 프린트 디자인.

2000년대 초 앙드레 김이 집중했던 명화 프린트 디자인.

패션을 문화 콘텐트의 지위에 올려놓은 앙드레 김의 한 발 앞선 도전은 디자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번 쇼 ‘위대한 아트의 영속성’ 섹션에서 보여준 옷들이 그 예다. 고흐, 클림트 등의 명화를 프린트한 의상들이 무대 위에 펼쳐졌는데, 이는 2000년대 초 앙드레 김이 집중했던 디자인이다. 아들 김중도씨는 “당시는 큰 폭의 원단에 프린트를 할 만큼 인쇄시설이 발달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는 백방으로 수소문해 마침내 그 일을 해냈다”고 기억했다. 지난해 루이비통은 현대작가 제프 쿤스와 손잡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의 명화를 패션 아이템에 구현해 큰 주목을 받았다. 앙드레 김의 시도는 이보다 20년이나 앞선 도전이었다.

장광효 디자이너는 “앙드레 김 선생은 자신만의 퍼포먼스와 장르가 확실한 디자이너로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면 발렌시아가, 입생로랑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이상봉 디자이너 역시 “누군가는 입기 어려운 옷만 만든다고 비판하지만 선생은 기성복이 아닌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를 추구하셨기 때문에 유행보다는 자신의 세계관과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쪽을 추구했다”며 “한국 패션의 문화적 수준을 높인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영희 스타일리스트는 “독특한 말투와 헤어·패션 스타일 때문에 희화된 면이 있지만 그만큼 패션과 패션 디자이너의 영역을 대중에 각인시킨 사람은 없었다”며 “선생의 존재감은 대한민국 패션사에 굵은 획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쇼를 기획한 아름회 김효진 회장은 언제나 ‘판따스틱하고, 뷰우티풀한 패션’을 사랑했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쇼에 참가하는 어떤 연예인이라도 리허설은 꼭 참석해야 했지만 학교 시험 등의 스케줄이 있는 모델들은 리허설 참가를 제외시켜줬다. ‘학생은 본분인 공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게 선생님의 생각이었다. 호텔에서 큰 쇼를 할 때면 모델들의 부모님까지 초대해 자식의 무대를 지켜보게 했다. 또 연예 소속사에서 모델들을 배우로 데뷔시키기 위해 패션 무대 활동을 못하게 하면 선생님은 소속사에 전화를 걸어 ‘패션은 문화고 예술’이라며 호통을 쳤다. 덕분에 모델 활동이 제한된 이들도 선생의 쇼 무대만큼은 할 수 있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의상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현재 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글=서정민·유지연 기자, 사진=우상조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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