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촌 사람이 농부처럼 오페라 본토에서 견뎠다"

중앙일보

입력

"나보다 머리 하나 큰 유럽 성악가들을 하인으로 거느리는 왕 역할을 하면서 완벽주의가 몸에 익었다"는 베이스 연광철. "고개를 들지 않고 노래하면 키 큰 그들이 수그리고 내 눈을 맞춘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보다 머리 하나 큰 유럽 성악가들을 하인으로 거느리는 왕 역할을 하면서 완벽주의가 몸에 익었다"는 베이스 연광철. "고개를 들지 않고 노래하면 키 큰 그들이 수그리고 내 눈을 맞춘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고,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처음으로 피아노를 쳤습니다. 베를린ㆍ빈ㆍ뉴욕 무대에서 노래하게 될 거라 생각하거나 계획했던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촌에서 자란 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려 노력했습니다.”

세계 무대 활동하는 베이스 연광철

지난 1일 성악가 연광철(53)의 2018 호암상 예술상 수상 소감이다. 고향은 충북 충주. 호롱불을 켜고 살던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어둠이 무서워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던 연광철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가 소 한 마리를 판 돈으로 청주대 음악교육과 등록금을 냈다. ‘본토 사람들이 어떻게 노래하는지 보자’는 생각으로 1990년 불가리아 소피아를 거쳐 독일 베를린에 갔다.

20년 넘게 유럽 무대에 서고 있는 성악가 연광철.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년 넘게 유럽 무대에 서고 있는 성악가 연광철.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빠른 속도로 세계 무대를 점령했다. 도밍고와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강력한 후원자로 그를 대형 무대에 추천했고 연광철의 공연은 이어졌다. 빈 국립 오페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밀라노 라 스칼라, 런던 코벤트 가든 등 오페라 가수들의 꿈과 같은 무대에 일상적으로 초청받았다. 그 일이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올해 1~11월 전 세계에서 출연하는 작품만 8편. 뉴욕에서 시작해 빈ㆍ파리ㆍ베를린ㆍ뮌헨ㆍ함부르크 극장에서 베르디ㆍ바그너ㆍ모차르트의 오페라 작품에 출연한다.
농부의 아들을 오페라 본고장의 주인공으로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호암상 수상을 위해 한국에 들른 그는 “큰 계획이나 목표가 없었다. ‘밀라노에 꼭 서야지, 어떤 역을 꼭 해야지’하는 생각으로 활동했다면 아주 괴로웠을 것”이라고 했다. 대신 구체적인 과제가 있었다. “이 작품 안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음악을 철저히 잘 알아야겠다, 이런 하나하나의 작은 목표들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도 연광철의 목표는 작고 구체적이다. 일년에 하나씩 새로운 작품을 하는 것이다.

뉴욕에서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로렌스 신부 역할을 지난달 마친 것으로 안다.

“사실은 별로 빛나지 않는 역이었다. 고음도 없고 드라마틱 하지도 않고 로미오와 줄리엣 주례 보는 정도여서 동료 성악가들이 왜 이런 역을 하러 왔느냐고 했다.”

그런 역을 왜 수락했나.

“1년 한 작품은 새로운 것을 하는 계획 때문이다. 했던 것만 하면 재미가 없고 얻는 게 없으니까. 내년에는 마스네 오페라 ‘마농’을 처음 한다.”

동양 사람에게 잘 맡기지 않는 바그너 ‘파르지팔’ 구르네만츠를 비롯해서 베이스로서 이미 할만한 역할은 다 했고 계속해서 섭외를 받고 있는데.

“이미 많이 해봤던 작품에서는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1년 전 했던 구르네만츠와 2년 전의 같은 역할이 다 다르다. 게다가 오페라 언어는 나에게 다 외국어다.”

독일어 발음이 정확한 것으로 호평을 받지 않나.

“하지만 독일어를 쓰는 지역은 넓다. 오스트리아 빈과 스위스 취리히의 독일어는 다르다. 예를 들어 ‘에’ 발음도 빈에서는 더 좁고 날카롭다. 'Ich'가 지역에 따라 ‘이히’ 또는 ‘이크’까지 다르게 발음된다. 이탈리아어도 그렇다. 얼마 전 한 동료가 내 노래에 볼로냐 사투리가 있다고 하더라. 외국인으로서 그렇게까지 알기는 힘들다. 매번 정확한 조언을 듣고 고쳐야 한다.”

2008년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스테판 헤르하임이 연출한 ‘파르지팔’에 구르네만츠로 출연한 연광철. [중앙포토]

2008년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스테판 헤르하임이 연출한 ‘파르지팔’에 구르네만츠로 출연한 연광철. [중앙포토]

지휘자나 연출자가 지역에 따라 발음을 다르게 요구하나.

“아니다. 관객 입장에서 보는 거다. 듣는 이에 따라 가사를 다시 공부해야 한다. 경상도 농담과 전라도 농담이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국 관객과  소통할 수 있지 않겠나.”

다른 독일 가수들도 그 정도로 세심하게 언어를 연구하나.

“내가 독일 사람이었으면 내 독일어가 진짜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는 외국인으로서 살아남아야 했다. 많은 성악가가 말(가사)보다 음악(소리)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좋은 소리를 내려고 가사를 뭉개고 가거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걸 달리기만 빠르고 공을 못 차는 축구 선수 같은 거라고 본다.”

듣기 좋은 소리보다 가사와 말이 더 중요한가.

“맞다. 소리 자체는 예술이 될 수 없다. 성악가 자체도 예술가라고 보기 힘들다. 소리만 들어서 감동할 수는 없다. 오히려 너무 크고 좋은 소리는 듣는 사람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소리는 너무 좋은데 감동이 없는 성악가가 많다.”

2013년 국립오페라단의 ‘파르지팔’에서 구르네만츠로 출연한 연광철. [중앙포토]

2013년 국립오페라단의 ‘파르지팔’에서 구르네만츠로 출연한 연광철. [중앙포토]

성악가로서 주고 싶은 감동의 종류가 무엇인가.

“사실 노래를 시작할 때는 먹고 사느라 했다.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하지만 이제는 작곡가와 청중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싶다. 듣는 사람에게 작곡가의 마음 상태와 생각을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작곡 배경을 연구하고 해석을 준비한다.”

노래를 시작하기까지는 힘들었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경력을 쌓아나간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오페라 극장의 전속 가수로 활동할 때 2년마다 계약을 다시 해야 했다. 처음 3~4년은 두꺼운 전체 악보 중에 딱 한 페이지만 나오는 역할도 했다. 그 때 하나도 절망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돈 받으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있었다. 페터 슈라이어, 피셔 디스카우 같은 대가들 노래를 월급 받으며 들을 수 있었으니까. ‘내년에 밀라노 라스칼라에 서야지, 뉴욕 메트에서 노래해야지’ 이런 목표가 있었으면 매년 힘들기만 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계획 대신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노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악가로서 무얼 하고 싶었나.

“노래를 잘 하고 싶었다. 같은 역을 했던 기존 성악가들과 똑같이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하는데 내 선율하고 오케스트라는 다른 선율을 하는 현대적인 진행이 나왔다. 그런걸 혼자서 고민하며 공부하는 시간이 길었다. 공부 끝에 공연 한번 해보면 지휘자랑 안 맞고, 그 다음엔 내가 낸 소리가 마음에 안 들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배웠다. 바그너는 무대에서 50번은 해봐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었다. 큰 계획이 대신 노래를 잘 하겠다는 작은 마음이 이어지면서 여기까지 왔다.”

도밍고ㆍ바렌보임 등 좋은 후원자가 많았다.

“후배 성악가들에게도 하는 얘기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오는데 그때 준비가 돼있는지가 중요하다고. 93년 도밍고 콩쿠르의 베를린 지역 예선에서 원래 떨어졌다가, 본선 진출자 중 한 명이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본선에 불려갔다. 그 사이에 4개월 정도가 있었는데 좌절하지 않고 계속 노래를 한 덕분에 우승을 했다. 그때 놀고 있었으면 기회가 없었을 거다.”

은퇴 후 시골에 가서 살겠다는 이야기를 늘 했다.

“60세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너무 얼마 안 남았다.(웃음) 계절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살고 싶다.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자랐다. 사과꽃을 솎아내고, 사과 중에 큰 놈은 남겨서 내년을 준비하며 자연의 섭리와 인내를 배웠다. 농부가 욕심내지 않듯이 오페라 무대에서도 그런 자세로 기다리면서 여기까지 왔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