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의 뿌리' 고전을 읽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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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권부장과 중앙샘의 조언을 듣고 노력한 결과, 이제 제이는 논술실력이 웬만큼 갖춰졌다. 논제와 제시문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이뤄지면서, 다른 학생들보다 안정적인 논술문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요샛말로 '2% 부족'하다. 창의력이 다소 부족할 뿐 아니라 논술문에 자기 목소리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고전(古典)은 논술의 스승이다.

중앙샘: 제이야, 너는 논술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니?

제이: 학원에서 배우거나 시중에 나와 있는 논술 책을 통해서 준비하고 있어요.

권부장: 논술 해설서 외에 따로 읽고 있는 책이 있니?

제이: 아니오. 중학교 때까지는 적잖게 읽었는데, 고등학교 올라오면서부터는 내신 준비다 뭐다 하면서 교과 이외의 책은 손도 대지 못했어요.

권부장: 네가 쓴 글을 보고 대충 예상은 했단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쓸 글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논술은 문제와 정답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해설서에 익숙해지다 보면 창의적인 논술문이 나오지 않지. 창의적인 글, 풍부한 내용과 자기 견해가 녹아드는 글을 쓰려면 폭넓게 독서해야 한단다.

제이: 네. 하지만 학과공부하기도 벅차서 다른 책 읽을 엄두가 안 나요. 그리고 어차피 논술도 시험 아닌가요?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잖아요. 또 창의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창의력이 뭔지 시원하게 알려주는 선생님도 없고요.

중앙샘: 네가 답답해 하는 것은 이해가 돼. 그렇다고 누가 가르쳐 주기만 바라면서 무관심하게 기다리는 자세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제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떻게 하면 창의력을 기를 수 있을까요?

권부장: 제이야, 고전(古典)은 논술의 스승이란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읽고 배우던 지식의 보물창고지. 논술문제를 내는 사람도, 논술문제를 푸는 사람도 고전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을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실전적인 논술 해설서를 보기 이전에 고전을 읽고 사고의 깊이를 먼저 키우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중앙샘: 시험준비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야. 요즘 대입 논술시험에서도 참신하고 깊이 있는 사고력을 요구하는 형태의 문제가 많이 나오고 있단다. 이런 경향에 대비해서 창의력과 논술실력을 함께 기를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방법이 있지.

논술실력은 모방에서부터 시작된다.

제이: 그래요? 선생님, 그게 뭔지 빨리 알려주세요.

중앙샘: 모방이란다. 남의 글을 읽고 따라해 보는 거지. 특히 논술의 경우는 짜임새 있는 글을 분석도 해보고, 베껴쓰기도 하고, 흉내도 내보고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거야.

권부장: 글을 쓰는 작가나 언론사의 기자들도 지속적으로 각 분야의 고전을 읽으면서 자신의 글을 가다듬곤 하지. 물론 새로 나온 책들도 계속 읽어 보려 애쓰고 있지만 역시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온 고전이 생각의 폭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된단다.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애써 만들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 학문의 구획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그때그때 편의대로 만든 것일 뿐이다. 진리는 때로 직선으로 또 때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학문의 경계를 관통하거나 넘나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학문의 울타리 안에 앉아 진리의 한 부분만을 붙들고 평생 씨름하고 있다.

(중략)

지식은 대체로 보아 16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쪼개지기 시작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식 자체가 쪼개진 것이 아니라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과 사람들이 쪼개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세기를 마감하며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찾아낸 부분들을 한데 묶어도 좀처럼 전체를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통섭'(에드워드 윌슨 씀)의 옮긴이(최재천) 서문 중에서

중앙샘: 이 글은 진리와 학문의 큰 차이를 겸허하게 고백하고 있어. 학문의 분야가 자꾸 쪼개지다 보니 비슷한 분야에서 연구하는 학자끼리도 좀처럼 교류가 되지 않고 낯설어 하기 일쑤라는 거지.

제이: 음. 열심히 학문을 탐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할 수는 없다는 얘기죠?

권부장: 그렇지, 바로 그거야. 이 글의 저자는 과학자이지만 인문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어. 논술을 공부하는 너와 나의 입장에서도 배울 게 많구나. 제이도 점수에만 연연하지 말고 좀 더 넓고 크게 사고하는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다.

제이: 네. 사실 논술문을 작성하다 보면 쓸 말이 없어서 난감했던 적이 많아요.

중앙샘: 논술은 생각만 한다고 실력이 느는 게 아니야. 좋은 글을 자주 보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해. 가장 기본적으로는 옮겨 적는 것이 좋은 방법이지. 좋은 글의 내용을 요약해 보거나 개요를 짜보는 것도 좋지.

권부장: 고전을 읽고 전체적인 글의 짜임새를 잘 알고 있으면 어떤 논제가 나와도 적용하기 쉽지. 좋은 글의 짜임새와 틀을 흉내내 다른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 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될 거야.

중앙샘: 제이야, 이거 한 가지는 꼭 명심해 두었으면 한다. 생각만으로는 결코 좋은 논술을 쓸 수 없어. 다른 사람의 좋은 생각과 좋은 글을 끊임없이 접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꼭 필요하단다. 그러다 보면 논술실력이 점점 쌓이는 것을 느끼게 될 거야.

제이: 잘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다른 책을 안 본게 후회되네요. 앞으로는 논술 참고서 뿐 아니라 신문.고전 등 다양한 분야의 좋은 글을 많이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제이의 일기

나는 논술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사고의 깊이는 내가 읽은 책을 통한 간접경험과 평소 생활 속에서 느끼고 배운 직접경험 속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나는 그동안 앞서간 선인들의 다양한 철학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너무 소홀히 해 왔던 것 같다. 당장 글을 쓰는 기술을 키우기보다 여러 분야의 고전부터 신문에 나온 최근 사설까지 좋은 글을 많이 읽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다시 새겨본다.

<권영민의 논술이야기 1화 - 제이의 논술일기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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