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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반죽의 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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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호 20면

윤광준의 新생활명품 <82> 권오길 손국수

누구나 불현듯 먹고 싶은 음식이 있게 마련이다. 내겐 명동 칼국수가 그렇다. 퇴계로나 을지로를 지나칠 때면 강렬한 충동이 문득 솟구친다. 대학시절부터 들락거렸던 국수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한다. 모든 게 변한 서울에서 기억과 장소가 일치하는 드문 경우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먹은 칼국수 맛은 변함이 없다. 묘한 안도감으로 흐뭇해진다.

부산이나 대구, 대전 출신 친구들에게서도 칼국수 이야기를 들었다. 동세대의 기억이 동시다발로 국수와 연결되는 게 재미있다. 왜 유명 칼국수집은 경부선 철도 주변 도시에 몰려있을까.

이유를 추적해 봤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다. 국내에 밀가루가 대량으로 들어온 시기와 경로에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가 있다. 구호물자는 부산항으로 들어왔고 철도를 통해 전국으로 퍼졌다. 일부는 인천항을 통해 서울과 경기권으로 흘러나갔다.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으로 북적였던 부산이다. 밀가루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칼국수의 인기는 보지 않아도 훤하다. 구포에 들어섰던 많은 국수공장들, 메밀을 구하지 못해 밀가루로 대신한 냉면인 밀면이 부산에서 출발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대구도 사정은 비슷했다. 안동국시로 대표되는 경상도식 칼국수가 허기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대전은 일제 강점기 철도 교차점의 배후도시로, 전쟁 통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배고픔은 모두의 문제였다. 그나마 흔한 것이 구호물자인 밀가루였다. 손쉽게 만들어 먹을 만한 음식으로 국수만한 것이 없었다. 대전역 근처에 칼국수집과 우동집이 바글댔던 이유다. 지금도 대전 시내에는 곳곳에 칼국수집이 많다. 전국에서 모여드는 신탄진의 유명 칼국수 집 연원은 생각보다 길다.

인천은 어떤가. 인천은 화교의 도시다. 구한말 때부터 산둥성 출신 중국인들에 의해 짜장면이 만들어진다. 이후 원조품 밀가루가 들어오며 전국적 확산의 과정을 밟는다. 짜장면에 얽힌 애환과 추억 한 자락 갖고 있지 않은 한국인은 없다.

여기에 라면이 더해진다. 중국의 튀김면을 일본에서 개량해 인스턴트화한 게 라면이다. 이어 우리나라에 들어와 바로 국민들의 입맛을 휘어잡는다. 60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생산량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간판 상품이 되었다. 라면은 이제 우리가 주도하는 세계인의 음식이다.

누구나 먹는 국수, 누구나 먹게 된 것은 100년도 안 돼

전쟁 이전에도 물론 국수를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밀가루의 수급문제로 보아 폭넓게 먹은 것 같지는 않다. 그야말로 어쩌다 한 번 먹는 별식이었을 게다. 국수방망이로 밀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만들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맛은 특별한 기억이었다는 말이다.

대단히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일본의 국수 연원과 확산 과정도 비슷하다. 일본도 우리와 똑같이 미국의 구호물자를 받아 살았던 시절이 있다. 인스턴트 라면이 나오게 된 이면은 배고픔의 극복이었던 거다.

잔치국수·비빔국수·회국수·냉면·밀면·당면·짜장면·짬뽕·라면·파스타 . 면류만큼 흔하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드물다. 국수의 맛이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할 정도다. 온갖 제법과 조리법이 인터넷에 떠돈다. 하루 끼니를 모두 국수로 해결하는 국수성애자들도 많다. 특히 맛집 순례를 사명처럼 여기는 냉면 덕후들의 극성은 유별나다. 원조와 짝퉁을 기막히게 구분하고 먹는 법까지 정해놓을 정도다. 라면을 포함해 1인당 국수 소비량은 우리나라가 세계 일등이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은 면 공화국이다. 이토록 좋아하는 국수를 누구나 먹게 된 것은 길게 잡아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요리에 조예 깊은 이욱정 PD의 작품 ‘누들 로드’를 봤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발굴된 2500년 된 미라의 부장품에서 국수의 흔적을 찾아낸 정성과 노력은 대단했다. 이후 밀의 재배지역을 따라 국수가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 세계 60억 인구가 먹는다는 국수다.

이 PD는 국수의 매력을 천변만화의 다양한 음식이라 했다. 요리된 생선의 모양과 밥을 지은 쌀은 본래의 모습이 바뀌지 않는다. 국수에선 밀의 형체를 찾지 못한다.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액체처럼 밀가루의 변신은 극적이다. 원재료에서 멀어진 식감과 형태의 차이는 수 만개의 개성으로 다양해진다. 국수가 사랑받는 이유를 수긍한다.

최상급 밀가루에 국산 천일염, 모래시계로 조절하는 최적의 맛

그토록 많은 국수집 중 마음에 드는 곳은 한두 곳뿐이다. 내 입맛에 맞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줄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곳 중에 ‘권오길 손국수’가 있다. 60년 동안 대를 이어 국수만 만들어온 장인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면발의 쫄깃함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해서 이로 맛을 느낄 정도다.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국수 맛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소문의 주인공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이웃에 사는 후배가 다리를 놔줬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 소개되어 이미 유명세를 탔지만 권오길은 겸손했다. 초로의 사내는 우직한 품성과 두터운 손이 잘 어울렸다. 지금도 직접 반죽 일과 과정을 일일이 체크하며 일한다. 그의 손은 생각과 행동을 함축해 놓은 상징처럼 보였다. 다짜고짜 맛있는 면의 비결을 물어봤다. 대답은 싱거웠다. “좋은 재료로 정직하게 만들면 됩니다.” 나를 감동시켰던 명품 제작자들에게 들었던 말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나는 입을 닫았다.

국수는 최상품 밀가루에 조제재료를 더하고 국내산 천일염을 쓴다. 반죽의 함수율과 눌린 정도가 쫄깃함을 좌우하는 조건이다. 수십 년 반복해 얻은 경험의 감각이 적당함을 찾아낸다. 반죽을 주물러 보면 손끝에 전달되는 느낌이 있다고 했다. 양손을 써도 왼손은 알기 어려운 오른손 만의 감지능력으로 안다는 것이다. 평생 국수 반죽을 수시로 개고 치대며 얻은 몸의 기억이 감각의 정량화를 끌어온 듯 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적절한 비율과 압력의 조절은 자연스럽다. 국수의 탄성과 독특한 식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국수는 허투루 대할 수 없다는 말에 공감했다.

그의 국수는 직접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을 때 가장 맛있다. 생면을 쓰기 때문이다. 해물이 들어간 국물로 끓인 칼국수의 맛은 여느 업소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최적의 맛과 식감을 위해 모래시계가 테이블에 놓인다. 끓이는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라는 의미다. 같은 밀가루가 만든 사람에 따라 이토록 맛이 달라진다. 좋은 물건의 뒤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국수의 맛은 평생의 시간을 바친 인간의 맛이기도 했다.

‘권오길 손국수’는 자신의 식당에 찾아올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건면을 생산한다. 권스 누들이란 이름으로 팔린다. 눌린 반죽을 칼 대신 롤러로 썰어낸다. 건조과정을 자동화시킨 점만 빼면 예전의 마른국수와 다를 게 없다. 자신의 국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팔 정도의 양만 만든다. 제 손을 벗어난 국수는 ‘권오길 손국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광고회사 제일기획은 꼭 챙겨야 하는 귀한 분들에게만 보낼 선물로 이를 기꺼이 선택했다. 국수 맛을 본 이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세상에 국수 맛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느냐는 탄성과 함께…. 암으로 죽어가던 환자가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먹고 싶었던 음식도 ‘권오길 손국수’였다. 아쉽게도 소박한 꿈은 생전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스스로 걸어 찾아오지 못했으므로.
미루지 마시라. 삶의 의욕이 있다면 맛있는 국수 한 그릇부터 비울 일이다. ●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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