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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남용' 넘치는 대한민국…"경각심 주지만 업무 위축 우려"

중앙일보

입력

남용되는 '직권남용'…"억울함 호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직권남용’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급자와 의견 갈등이 있거나 지시가 부당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직권남용 적용을 남발하는 것은 검찰 수사와 사법행정 측면에서 큰 낭비입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최근 논란이 되는 사건 대부분에 직권남용 혐의가 등장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법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상급자와의 갈등 국면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직권남용이 남발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국정농단 의혹의 경우 대통령과 수석비서관, 장관 등 직권의 범위가 넓은 인물들이 대거 피의자로 등장한 탓에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된 특수한 케이스일 뿐”이라고 말했다.

논란된 사건의 중심부엔 늘 '직권남용'

서지현 검사는 2010년 한 장례식장에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에 의해 성추행을 당했고, 이후 인사 불이익 조치가 잇따랐다고 주장했다. 성추행 진상조사단은 직권남용 혐의로 안 전 국장을 기소했다. [연합뉴스]

서지현 검사는 2010년 한 장례식장에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에 의해 성추행을 당했고, 이후 인사 불이익 조치가 잇따랐다고 주장했다. 성추행 진상조사단은 직권남용 혐의로 안 전 국장을 기소했다. [연합뉴스]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련의 사건들엔 ‘직권남용’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서지현 검사의 인사 불이익 의혹에선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이, 강원랜드 수사단이 제기한 ‘수사 외압’ 국면에선 문무일 검찰총장이 직권을 남용한 당사자로 지목됐다. 박근혜 정부의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역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의 직권남용 혐의가 주를 이룬다.

이완구 전 총리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수사한 검찰의 직권남용을 주장하며 최근 수사팀을 고소했다. 당시 수사팀을 이끈 문무일 검찰총장도 고소 대상에 포함됐다. [연합뉴스, 뉴스1]

이완구 전 총리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수사한 검찰의 직권남용을 주장하며 최근 수사팀을 고소했다. 당시 수사팀을 이끈 문무일 검찰총장도 고소 대상에 포함됐다. [연합뉴스, 뉴스1]

‘성완종 리스트’ 의혹으로 기소됐다가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완구 전 총리는 최근 검찰의 직권남용을 주장하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고발장에는 당시 수사팀을 이끌었던 문무일 총장과 수사팀 전원이 고발 대상으로 지목됐다. 수사팀이 증거자료를 조작하고 폐기하는 것을 넘어, 일부 증거를 의도적으로 법원에 제출하지 않은 것은 검사로서 직권을 남용한 것이라는 게 이 전 총리의 주장이다.

입증 어려운 직권남용…기소돼도 무죄 선고가 대부분 

형법 123조에 따르면 직권남용은 공무원이 직무상 권한을 남용해 상대방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시켜 권리를 침해할 경우 성립되는 혐의다. 적용대상(공무원)이 제한돼 있는 데다 직무상 권한의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고, 권한 남용이 법에 없는 일을 하는 행위로 실제 연결됐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등 구성요건이 까다로운 대표적인 범죄이기도 하다. 매년 직권남용 혐의로 입건되는 1000여건의 사건 중 실제 기소로 이어지는 비율이 2%대에 그치는 이유다.

검찰 기소로 재판 단계로 넘어간다 해도 실형을 선고받는 경우가 드물다. 실제 2016년 한 해 동안 직권남용 혐의로 대법원 판결을 받은 피의자 12명 중 9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1명은 벌금형을, 나머지 2명만 실형이 선고됐는데 이마저도 뇌물 수수 혐의 등이 겹쳐 가중처벌을 받은 케이스였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핵심 혐의 된 직권남용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4월 국정농단 1심 재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연합뉴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4월 국정농단 1심 재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연합뉴스]

상황이 이런데도 직권남용이 남발되는 경향이 심화하는 것은 국정농단 의혹사건이 ‘선례’로 작용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실제 국정농단 사건의 피의자 38명 중 15명은 직권남용 혐의를 받아 구속됐다. 이 중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대부분은 재판에서도 유죄를 선고받았다.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국정농단 사건의 경우 검찰 수사와 재판이 일정 부분 ‘정치적’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평소보다 직권남용 혐의를 더욱 폭넓게 해석하는 문제가 있었다”며 “관련 사건에서 피의자 대부분이 대거 구속되고 재판에 넘겨져 유죄까지 받은 선례가 있기 때문에 법원에선 향후 비슷한 양상의 사건에서도 실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질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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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에선 직권남용 남발이 공직사회에서 공무원들의 정책 추진 부담을 가중시키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업무상 상급자와 갈등을 겪거나, 상급자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느껴져 직권남용을 남발할 경우 공직사회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익명을 요청한 한 부장검사는 “직권남용과 정상적 직무 집행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아 엄격히 처벌하면 공무원들이 정당한 권한 행사도 주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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