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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돕는다는 임대차보호법, 임대료 인상 촉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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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절벽 내몰린 320만 소상공인 

서울 동교동 홍익대 앞 ‘걷고 싶은 거리’에서 보쌈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모(62)씨는 최근 1년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지난 수년간 아무 말이 없던 건물주가 지난해 보증금을 기존 1억원에서 2억원으로, 월 임대료는 600만원에서 900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사실상 ‘나가 달라’는 통보였다. 이씨는 권리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사실상 쫓겨났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수십m 떨어진 곳에 크기를 줄여 다시 음식점을 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 1월부터 최저임금이 껑충 뛰면서 인건비 부담마저 커졌다. 어쩔 수 없이 직원 세 명 중 한 명을 내보내고 대신 아내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 못 읽은 정책 되레 역효과 #세입자 보호 보증금+임대료 기준 #서울 4억에서 6억으로 올리자 #건물주들, 법 피하려 6억 이상 올려 #임대료·최저임금·불황 겹쳐 삼중고

320만 소상공인들이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리고 있다. 최저임금과 임대료의 급격한 인상, 그리고 경기 불황이다. 중앙일보가 소상공인을 대표하는 법정 경제단체 소상공인연합회와 공동으로 ‘지난 1년간 소상공인 경영 실태조사’를 했다. 총 505명의 소상공인이 응답한 이번 조사에서 ‘지난 1년간 경영환경 변화’에 대한 질문에 50.3%가 ‘다소 어려워졌다’, 38.7%가 ‘매우 어려워졌다’고 대답했다. 소상공인 100명 중 89명이 ‘어려워졌다’고 답한 것이다. 1년 전과 비교한 월 매출 변화에 대한 질문에는 ‘줄어들었다’고 답한 사람이 81.4%에 달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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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공인들을 어렵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올 1월 16.4% 전격 인상된 최저임금이다. 응답자의 30.6%가 ‘최저임금 인상’을 꼽았다. 다음으로 높은 임대료(20.8%), 동종 업체 경쟁 심화(14.9%) 순이었다.

1년 전 새 정부 출범 이후 최근까지 정부의 소상공인 정책에 대한 체감 만족도를 묻는 말에는 37.7%가 ‘매우 미흡하다’고 답했고, ‘다소 미흡하다’(36.5%)까지 포함한 부정적 반응은 74.2%에 달했다.

상가 임대료의 급격한 인상은 전국적 현상은 아니지만, 역시 ‘정부 정책의 역효과’로 분석된다. 중소상인을 위해 마련한 제도가 오히려 이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올 1월 26일 개정 시행된 상가임대차보호법의 주요 내용 중에는 환산보증금의 상향 조정과 상가임대료 인상률 하향 조정이 있다. 환산보증금이란 보증금과 월세 환산액을 합한 금액을 말한다. 보증금이 1억원, 월세 200만원일 경우 ‘1억원+(200만원×100)’으로 계산해 3억원이 된다. 서울의 경우 기존에 4억원이던 환산보증금이 6억1000만원으로 올랐다. 상가 임대료 인상 증액 한도율은 기존 9%에서 5%로 줄어들었다. 환산보증금 기준 6억1000만원 이하의 상가건물 세입자는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아 상가 임대료 인상 한도를 연 5% 내로 묶어둘 수 있다는 얘기다.

소상공인연합회 정원석 본부장은 “월세가 묶일 것을 우려한 건물주들은 1월 개정 임대차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임대료를 대폭 올렸다”며 “서울의 경우 환산보증금이 현재 평균 7억5000만원으로 추정돼 많은 소상공인이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5%로 낮춘 임대료 인상률 또한 계약 갱신의 경우엔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임대료의 과도한 인상을 사실상 막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박주영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부 교수는 “주 소비층인 40~50대는 교육비와 주거비 때문에 돈을 못 쓰고 청년들은 취업이 안 돼 돈을 못 쓰니 불황이 깊어지는 것”이라며 “여기에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라는 단기적 악재와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임대료 인상까지 겹치면서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최준호·김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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